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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 문 학

열녀문의 비밀

[책갈피] 2005. 8. 11. 12:04

  열녀문의 비밀

 

<김탁환>의 『열녀문의 비밀』을 읽었다.   그의 작품은 『방각본 살인사건』이후 거의 1년 만이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서러워라, 잊혀 진다는 것은』이라는 작품이었으니, 이 소설은 그와의 세 번째 만남이 되는 셈이다.  그의 작품은 우선 빠르게 읽힌다.  속도감 넘치는 전개와 고어들의 빈번한 사용으로 의고체 맛까지 살려내는 그의 소설은 지리부진하지 않고 물 흐르듯 명쾌하다.  그래서 한번 손에 잡으면 쉽게 놓기 어렵다.  게다가 이 작품의 경우는 역사적 사건에 추리라는 장르가 어우러져 여름철 더위 죽이기에도 효과가 그만일 듯하다.

 

   ‘백탑파, 그 두 번째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열녀

  문의 비밀』은 『방각본 살인사건』의 후속편인 셈이

  다.  『방각본…』에서 등장하는 ’백탑파‘ 인물들이

  그대로 나오고, 시대 설정도 ’방각본 살인사건‘이 해결

  된 5년 후로 되어있다.

  '백탑파‘ 란 영·정조시대의 대표적 지식인 그룹으로,

  일찍이 선진문명에 눈뜨고 정치개혁을 주창한 사람들

  로 탑골(원각사)의 백탑 아래에 모여 시문을 공부하

  고 경세를 논한 이들에게 붙여진 이름으로 박지원, 홍

  대용,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을 지칭하는 말이다. 


  바야흐로 때는 1784년.  정조의 명에 의해 검서관으로

  등용된 서얼 출신 백탑파 인재들인 박제가,이덕무, 유

  득공, 서이수.  이들은 등용된 지 5년이 지났지만 정권

  의 핵심에는 접근하지 못한 채 가슴속에 품은 원대한

  꿈을 펼칠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다.   임진.병자 양란을 거친후 18세기 조선사회는 중국으로부터 외래의 새로운 문물이 흘러들어 오고, ‘공맹지도’의 가치관이 흔들리며 ‘야소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서서히 민간에 침투를 시작하는 시기이다.  이러한 시대상황하에서 경향 각지에서는 가문의 영광―물론 기득권의 강화라는 속셈이 따로 있다―을 높이려 ‘열녀문’을 세워달라는 요청이 쇄도한다. 

이런 참에 이덕무에게 적성 현감자리가 제수되고, 때를 같이하여 정조는 의금부 도사 이명방―이 책의 話者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에게 가짜 열녀를 밝히라는 특명을 내린다.  가짜 열녀를 징벌하고, 귀감이 되는 열녀의 행적을 통해 흔들리는 유교의 이상과 가치관을 정립하고 사회정의를 세우려는 게 그 목적이다.

 

이명방은 친구인 화광(花狂 ; 꽃에 미친 사람) 김진과 함께 조사에 착수한다.  이 들이 첫 번째 조사대상으로 지목한 게,  바로 이덕무가 현감으로 부임하게 되는 적성현에서 올라온 임참판댁 며느리 ‘김아영’이다.  김아영은 결혼하자마자 병약한 남편을 여의고 가세를 일으킨 뒤 자진했다고 임씨 문중의 품신의 글에 올라와 있다.  너무나도 완벽한 김씨의 행적을 적은 글에서 이 들은 사후 조작의 냄새를 맡는다.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김아영에 관한 놀라운 사실들이 한겹씩 벗겨진다.  김아영은 백탑파 못지않게 새로운 문물과 정신에 마음을 열었던 선진적 지식인이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실제로 그 지식을 실험했던 놀라운 여성이었던 것이다.  농기구를 개량하고 정전법을 시험했으며, 집안의 노비들을 교육하고 자유를 상으로 내걸어 생산을 독려했다.  심지어 객주를 오가며 상업을 배워 막대한 부를 얻었다.  김아영은 열녀종부이기 이전에 혁신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으며 이것이 화를 불러왔다는 사실이 조사를 통해 밝혀진다.  당시 절대 윤리였던 '공맹지도'에 속박되지 않고 자유로운 사고를 가졌으며 야소교도의 신분을 가진 김아영은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인물로 비춰졌던 것이다.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당대의 규범은 한 여인을 비참한 죽음으로 몰고 갔다.  한마디로 김아영은 보수와 개혁, 유교와 기독교라는 문명의 충돌 지점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이었다.


또, 작품 중에는 실존하는 고소설 『여와전』, 『투색지연의』, 『사씨남정기』, 『소현성록』 등의 책들과 그 내용들도 자주 언급된다.  열녀 김아영은 그렇듯 바삐 살면서도 고소설의 열렬한 구독자였으며, 직접 창작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소설속의 이유보다는 작가 자신이 국문학을 전공했던 이력을 한껏 살려 다양한 부류의 고소설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열녀’라는 단어는 영광이라 화려한 외양 속에 내면적으론 당사자인 여인들에게 있어 상당한 고통을 강요하고 죽은 뒤에야 얻을 수 있는 남성을 위한 명예이다.  한마디로 약자가 속박을 강요당했던 불운한 시대의 슬픈 유산인 것이다.   소설은 결말에 반전을 시도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백탑파 서생들은 결코 꿈꾸었던 것과 같은 중앙으로부터의 개혁을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다만 김아영을 통해서 그들이 품고 있던 이상을 일부나마 실현했던 건 작가의 작은 배려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개혁이란 그제나 지금이나 참으로 이루기 어려운 과제인가 보다. 현 시국에 있어서도 부동산대책, 입시대책, 행정도시 문제 등 어느 하나 속 시원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일차적으로 정책 또는 전략의 부재, 상황판단의 실수 등의 원인으로 돌릴 수 있겠으나, 기득권을 주장하는 계층의 저항이 워낙 드세어서 그 앞에선 어느 논리도 설득되지 못한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들이 양보하지 않는 한, 개혁은 그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뿐이다.

 


 

저자 <김탁환>은 1968년 진해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와 건양대학교에서 가르쳤다.  현재 한남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으며, 1995년부터 소설 집필을 시작하여 자료 읽기와 사상사적 해석을 담은 장편 역사 소설들을 다수 발표하였다.

작품으로 『독도 평전』, 『허균, 최후의 19일』,『압록강』,『나, 황진이』,『서러워라, 잊혀 진다는 것은』,『방각본 살인사건』,『열녀문의 비밀』등이 있으며, 현재 텔레비전 드라마로 방영되고 있는 여덟 권짜리 대하 소설 『불멸의 이순신』이 있다.  문학비평집으로 『소설 중독』, 『진정성 너머의 세계』, 『한국 소설 창작 방법 연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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