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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 문 학

비명을 찾아서

[책갈피] 2005. 8. 11. 08:36
 

비명을 찾아서


대체역사(代替歷史) 소설은 과거에 있었던 어떤 역사적 사건의 결말이 실제와 다르게 진행되었다고 가정하고 그 뒤의 역사를 재구성하여 작품의 배경으로 삼는 기법으로, 주로 '과학소설(SF)' 등에서 쓰이고 있는 형식이다.  이 형식을 빌어 쓴 소설로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대표적인 작품을 들라면  <최인훈>의 『總督의 소리』와 <복거일>의 『碑銘을 찾아서』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두 작품은 조선총독부가 아직 살아있다는 가상에서 작품 구상을 시작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碑銘을 찾아서』가 이른바 대체 역사소설로서 실제 역사와 다른 역사 전개를 가상하여 현실을 전혀 새롭게 만들어내었다면, 『總督의 소리』는 가상을 하되, 실제 역사를 온존시킨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두 작품 다 가상의 이야기를 꾸미되 현실을 읽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 가상과 현실의 연결해 주는 고리는 일제의 조선총독부이다.


앞의 두 작품 중에서 역사왜곡으로 한.일간의 논란이 되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이번에 다시 읽은 『비명(碑銘)을 찾아서』에 대하여 몇 자 적고자 한다.  『비명(碑銘)을 찾아서』의 배경이 되는 곳은 1987년의 서울이 아닌 쇼우와(昭和) 62년의 게이조우(京城)이다.  이 소설은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했으나 죽지는 않고 부상만 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지 않았으며 조선과 만주국, 대만을 식민지로 한 채,내부 경영에 주력하여 미국과 소련 다음의 강대국이 된다. 반면 조선인들은 내선일체 정책에 의해 언어와 글을 잊어버리고 역사도 말살된 채 살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주인공인 히데요(39세)는 조선의 명문대를 졸업하고, 알루미늄 회사의 과장 신분으로 부장승진을 꿈꾸고 있으며, 시인으로도 데뷔해서 첫 시집을 출간했을 정도로 조선인으로서는 그럭저럭 잘 나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걸림돌이 되고 있는 짐은 그가 반도인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내지인 후배에게 부장승진을 빼앗기고 여자 후배도 합작회사 미국인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때부터 반도인이라는 것을 자각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집안의 뿌리(족보)를 알게 되고, 우연히 만난 노스님으로부터 한용운의 시집을 얻어 조선어 공부를 시작하면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달아 가게 된다. 

업무차 일본으로 출장가서 조선사와 조선어사전을 가져오지만 공항에서 압수당하고 경찰에 연행되어서 사상범으로 고초을 겪게 되는 동안 아내의 부정을 저지르게 되고, 결국은 주인공이 아내의 정부를 살해한 후 자신의 본명인 박영세라는 이름을 찾아 상해 임시정부로 떠나는 것으로 소설은 종결되고 있다.


작가가 대체역사로 설정한 상황 중에 경성올림픽 개최, 학생, 불만집단의 집단시위와 이를 빌미로 한 군부의 쿠데타 및 정권탈취, 언론통제 등은 80년대의 우리의 시대 상황과도 너무나 닮아서 한편으로는 씁쓰레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줄곧 작금의 일본에 의해서 주도되는 일련의 행위들, 즉 역사교과서 왜곡, 수상의 야스꾸니신사 참배, 평화헌법수정에 의한 군대보유 기도, 독도 영유권 제기 등으로 주변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는 그네들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이 소설 속에 설정되어 있는 상황 -한반도, 만주, 대만 등의 식민지 경영-을 꿈꾸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말 우리 모두가 정신을 차려 경계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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