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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미 문 학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W. G. 제발트>가  2001년에 발표한 장편소설『아우스터리츠』는 네 살 때 혼자 영국으로 보내진 프라하 출신의 유대 소년이 노년에 이르러 자신의 과거와 부모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는 내용으로 전 세계적인 극찬을 받으며 전미 비평가 협회상, 브레멘상, '인디펜던트' 외국 소설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이 소설로 <제발트>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스웨덴 노벨상 위원회의 한 인사는 제발트가 생존해 있었다면 노벨문학상이 수여되었을 것임을 시인한 바 있다―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아우스터리츠』를 발표한 해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히틀러가 유럽을 장악했을 때, 유대인 어린아이를 영국으로 피신시키는 구조운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영국은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약 1만 명의 유대 어린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 아이들 중에는 네 살이었던 프라하 출신의 ‘아우스터리츠’도 끼어있었다. 목사인 양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의 출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고, 아우스터리츠도 20세기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건축사가가 된 아우스터리츠는 이제는 꿈처럼 막연한 기억을 더듬어 자신의 유년 시절을 찾아 나서게 된다.  소설은 주인공인 ‘나’가 벨기에에서 늙은 건축사인 ‘아우스터리츠’를 만나면서 그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과거가 복원되지 않는 한 삶은 미완의 포즈에 머물고 아우스터리츠는 익명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의 핵심은 시간의 간극 속에서 익명의 존재들이 어떻게 부활하는지를 정밀하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모든 지나간 세월을 넘어 스스로에게 익숙한 삶에서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 자신이 고립된 아이임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 내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그때 이후 나 자신에 의해 억눌려 왔지만 이제는 강력하게 몰려오는 쫓겨난 존재와 지워진 존재라는 느낌 앞에서 이성은 속수무책이었어요."


작가는 시간의 저편에 빛바랜 듯 남아 있는 잃어버린 역사를 오늘의 시간 위에 불쑥 올려놓는다. 이 작품이 문제적인 것은 역사를 새롭게 건축하듯 무수한 세부 묘사로 재건하고 있다는 점이 있다.

 "실제로 내가 미혹당한 사람처럼 한가운데 서 있었던 그 대합실은 마치 내 과거의 모든 시간과 이전부터 억눌리고 사라져 버린 불안과 소망을 포함하고 내 발 아래 돌로 된 바닥의 검고 흰 다이아몬드 무늬가 내 생애 마지막 게임을 위한 운동장인 듯한, 시간의 전 차원으로 펼쳐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일인칭 화자 '나'가 아우스터리츠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전개되는 소설은 본문에 수록된 100여 장의 흑백 사진 및 이미지와 더불어 특이한 독서 체험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그가 골목 하나, 기둥 하나, 모퉁이 하나, 심지어는 보도석 하나에까지 집착하는 것은 그 속에 기억의 흔적이 오랜 세월을 이겨내고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사라져 버린 기억의 흔적을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한 공간 속에서 찾아내고자 하는 시도는 모자이크나 퍼즐 맞추기처럼 기억의 빈 곳을 하나하나 채워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아우스터리츠는 어머니가 수용되었던 체코의 테레진으로 향하고 강제수용소로 사용되던 시절의 시체 안치실과 집단 무덤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확인함으로써 기억 복원 작업은 일단락을 맺는다. 그러나 그의 기억 복원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집단의 기억으로 확대되고 역으로 집단의 기억은 개인의 기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이는 아우스터리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히틀러 치하 동유럽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1만명의 유대 아이들의 이야기이자 곧 유럽의 이야기인 것이다.

 

 


아우스터리츠(Austerlitz)라는 이름은 나폴레옹 시대의 격전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지명은 소설 속에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이름들―마리엔바트의 아우쇼비츠(Auschowitz) 샘물, 테레지엔슈타트의 바우쇼비츠(Bauschowitz) 분지―처럼 전쟁의 아픈 상흔을 간직한 아우슈비츠(Auschwitz)를 암시할지도 모른다.


[W. G. 제발트]

1944년 독일 남단 알고이 지방의 베르타흐의 유리 제조업을 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프라이부르크대학과 프리부르대학에서 독일문학을 공부하고 1966년 영국으로 이민을 떠나 1968년 맨체스터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어학을 가르쳤다. 1970년부터는 영국 노리치의 이스트 앵글리어 대학에서 문예학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973년에 알프레드 되블린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뮌헨의 독일문화원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1988년부터 이스트 앵글리어 대학의 정교수로 취임해 독일문학을 가르쳤으며, 이듬해 영국문학번역쎈터를 창립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발표되기 시작한 그의 작품들은 먼저 영국과 미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수전 손택>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며,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자주 거론되었다.  오히려 독일문단의 관심이 뒤미쳐 『이민자들』이 독일에서 발표된 이후 비로소 독일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사회의 주변인, 이민자, 유대인들의 삶에 주목하면서 역사와 문명의 크고 작은 재앙들을 성찰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이민자들』 외에 주요 작품으로 『자연 이후. 기초시(Nach der Natur. Ein Elementargedicht, 1988)』, 『현기증. 감정들(Schwindel. Gefuhle, 1990)』, 『토성의 띠. 영국의 순례(Die Ringe des Saturn. Eine englische Wallfahrt, 1995)』,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2001)』 등이 있고, 다수의 에쎄이를 발표했다. 페도르 말효 시문학상, 베를린 문학상, 요한네스 보브로프스끼 메달, 북독일 문학상, 에두아르트 뫼리케 문학상, 하인리히 뵐 문학상, 로스앤젤레스타임즈 북 어워드, 하인리히 하이네 문학상, 요제프 브라이트바흐 문학상, 브레멘 문학상, 내셔널 북 크리틱스 써클 소설상 등을 수상했다.

<제발트>는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지만 오늘날 독문학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구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최대의 산문 작가라 불릴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999년,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의 공습에 대하여 왜 독일 작가들은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문제를 제기한 『공중전과 문학』을 발표하며 논란의 중심에 선 뒤, 2001년 고향을 잃은 유대 소년의 기억의 복원 과정을 추적한 장편소설 『아우스터리츠』를 발표하며 전 세계적인 절찬을 받았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삼제회전(三帝會戰;Battle of the Three Emperors)이라고도 하는데, 나폴레옹이 가장 큰 승리를 거둔 전투의 하나로서 6만 8,000명의 나폴레옹군이 명목상 M. I. 쿠투조프 장군의 지휘 하에 있는 9만여 명의 러시아-오스트리아 동맹군을 물리쳤다. 1805년 12월 2일(율리우스력으로는 11월 20일)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Napoleon I)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거의 9시간에 걸친 힘든 싸움 끝에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지휘하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결정적으로 격퇴시켰다. 전투가 벌어진 장소는 모라바의 브루노에서 남동쪽 약 10km 떨어진 아우스터리츠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흔히 전술상의 걸작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아우스터리츠에서 프랑스군의 승리는 3차 동맹을 종결시키는 결과를 야기했다. 1805년 12월 26일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오스트리아가 전쟁에서 발을 뺀다는 프레스부르크 조약(Treaty of Pressburg)에 서명하고, 이전에 맺어진 캄포포르미오 조약과 뤼네빌 조약을 강화하여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의 독일 연방에 영토를 양도하고, 전쟁배상금 명목으로 4,000만 프랑(francs)을 부과 받았다. 러시아군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가받았다. 아우스터리츠의 승리는 프랑스와 다른 유럽국가의 완충지대로서 작용하는 독일 국가의 연합체인 라인 동맹(Confederation of the Rhine)을 창설하게 하였다. 1806년 신성로마제국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2세(Holy Roman Emperor Francis II)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Francis I of Austria)만을 공식적인 직함으로 유지하게 되면서 멸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취는 대륙에 지속적인 평화를 건설하지 못했다. 프로이센은 중부유럽에서 프랑스가 영향력을 키우는 것에 대해 우려하게 되고, 결국 1806년 제4차 대프랑스 동맹전쟁을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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