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남자[Man in the dark]
“나는 지금 어둠 속에 혼자 있으면서 내 머리 속에서 세상을 굴리고 있다. 또다시 불면증이 엄습해 와 이 엄청난 미국의 황무지 속에서 또 다른 하얀 밤을 맞이한 것이다.”
<폴 오스터, 『어둠 속의 남자』의 첫 페이지 중에서>
재기 넘치는 언어, 도회적인 감성, 마법과도 같은 문학적 기교와 아방가르드적 글쓰기로 요약되는 <폴 오스터>의 작품들은 사실주의적이면서 신비주의적 요소가 한데 뒤섞여 삶의 근원적 의미를 되묻게 만든다. 미스터리에 쌓인 사건, 방향감각을 상실한 인물, 드라마 세트와 같은 배경 등 그의 소설에 나오는 비현실적인 요소들은 오히려 현실의 다층성―열망과 좌절, 고독과 절망, 우연과 부조화, 강박 관념 등―을 지시하면서 현대인들의 마비된 감성에 파문을 일으킨다. 이번에 출간된 『어둠 속의 남자』는 오스터 특유의 기법이 잘 살아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스터의 소설에서 자주 보기 힘든 주제 의식을 담아 낸 소설이다.
일흔두 살의 은퇴한 도서 비평가 ‘오거스트 브릴’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증 환자다. 1년 전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데 이어 교통사고까지 당함으로써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한꺼번에 겪으면서 그는 외로움과 마음의 고통을 잊기 위해 하루 종일 방안에 앉아 줄창 이야길 지어내고 있다.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은 마술사로 생계를 이어 가며 평범하게 살던 '오언 브릭'이다. ‘오언 브릭’은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전쟁의 한복판에 떨어져 있다. ‘오거스트 브릴’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 속 미국은 9.11테러가 일어나지도 않았고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고 있진 않지만, 연방파와 독립파가 두 갈래로 갈려서 치열하게 내전을 치르고 있는 나라로 묘사된다. 2000년 대통령 선거 이후 미국에 내전이 발생하여 먼저 뉴욕 주가 연방에서 탈퇴하고 이어 15개 주가 그 뒤를 따른 것이었다.
이야기 속의 브릭은 갑작스레 처한 자신의 상황에 혼란스러워하지만, 곧 이 모든 상황이 브릴이란 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상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는 이 72세의 노인, 브릴을 죽이는 것이며, 바로 자신이 그를 죽여야 한다는 지령을 받는다.
이 부분은 영화 ‘터미네이터Ⅰ’을 떠올리게 한다. ‘터미네이터Ⅰ’에서는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 컴퓨터 전략 방어 네트워크가 스스로의 지능을 갖추고는 핵전쟁의 참화를 일으켜 30억이라는 인류를 잿더미 속에 묻어버리고, 남은 인간들은 기계의 지배를 받아 시체를 처리하는 일 등에 동원된다. 이때 비상한 지휘력과 작전으로 인간들을 이끌던 사령관 ‘존 코너’는 반기계 연합을 구성, 기계와의 전쟁을 시작하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이에 기계는 존 코너의 탄생 자체를 막기 위해, 2029년의 어느 날, 타임머신에 터미네이터를 태워서 1984년의 L.A로 보내 존 코너의 어머니인 ‘사라 코너’를 제거 하여 존 코너의 탄생을 원천적으로 봉쇄코자 시도한다.
작가가 만들어 낸 인물이 작가를 죽이는 게 과연 가능할까? 어쩌면 72세의 고통 받고 있는 브릴도 이야기 속의 오언 브릭을 통해 자신이 살해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소설은 이러한 독특한 설정을 통해, 이야기 속 인물과 이야기 밖 인물이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또한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브릭의 이야기와 브릴의 현실이 상응한다는 것을 독자는 알게 된다.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첫사랑에게 끌리는 이야기 속 주인공은 어려서 사랑에 빠져 결혼한 아내 소니아를 두고 젊은 소설가에 마음을 빼앗겨 이혼에 이르는 브릴의 모습이 투영된 것이며, 마지막에 자신의 인물을 잔혹하게 죽여 버리는 것은 브릴 가족이 현실에서 겪은 끔찍한 일에서 비롯된 결말이다.
『어둠 속의 남자』는 우리 생활의 여러 조각보들을 잘 기워서 실제와 상상이 하나임을 보여 주려고 시도한다. 아주 절망적인 시간에도 우리를 지탱해 주는 이야기의 놀라운 힘에 대해서 말한다. 이 소설은 우리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은 때에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환상의 책』같은 장편소설에서 폴 오스터의 등장인물들은 개인적 사건들에 의하여 변신을 겪게 되지만, 최근에 발표된 그의 작품을 보면 개인적인 문제에서 정치적인 문제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브루클린 풍자극』에서는 2000년 미국 대선 무렵의 현실 정치에 대한 적나라한 풍자와 야유를 통해 정치적인 관심을 보였지만, 이 작품 『어둠 속의 남자』에서는 부시 정부의 이라크 정책 등 외교 정책에 대해 노골적으로 미국의 정치 현실을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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