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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문학

바야돌리드 논쟁[원제 : La controverse de Valladolid]

[책갈피] 2007. 9. 5. 09:18

 

바야돌리드 논쟁[원제 : La controverse de Valladolid]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자 스페인은 원주민을 학살, 정복을 시작해 식민지를 개척했으며 원주민 인디오를 노예로 삼았다. 스페인은 신으로부터 ‘엔코미엔다(위탁)’와 ‘레케리미엔토(명령 또는 통고)’를 받았다며 신대륙의 식민화를 당연히 여겼다.  1501년부터 스페인 국왕은 스페인 귀족들에게 광대한 토지와 원주민을 ‘엔코미엔다’했다.

신대륙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스페인 귀족들은 원주민들을 보호(?), 기독교 신자로 개종시켜야 하는 의무도 지니게 됐다. 1513년 법학자들은 이를 ‘레케리미엔토’라는 문서로 작성했다. 명령을 거부하는 인디오들에게 벌이는 전쟁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하다는 ‘통고’도 담고 있다.  그 결과 잔혹한 살육과 정복이 자행됐다.

물론 이에 대한 반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511년 성도미니크 수도회의 젊은 신부 몬테시노스가 식민주의자들의 만행을 질타하면서 원주민의 인권을 옹호하는 세력이 결집했다. 1537년 교황 바오로 3세는 인디오들에게 영혼과 이성이 있음을 전제, 잔인한 행위를 금지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콜럼버스 동상]

 

1542년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는 원주민을 노예로 부리는 행위를 금지하고 엔코미엔다의 점진적 폐지를 겨냥하는 새로운 법을 제정하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면서 원주민들의 인구는 빠른 속도로 감소해간다. 이 같은 상황에서 카를 5세가 신대륙 원주민의 지위와 운명을 가름할 위원회를 소집, 논쟁을 벌이는데 이것이 바로 ‘바야돌리드 논쟁’이다.

 

<장 클로드 카리에르>가 쓴 『바야돌리드 논쟁』은 이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당시 식민경영에 혈안이 돼있던 사회적 분위기를 잘 반영한다.

1550년, 에스파냐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 바야돌리드―아메리카로 가는 길을 열었던 콜럼버스가 숨을 거둔 도시이기도 하다―에서 가톨릭교회의 주요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하나의 논쟁이 벌어진다. 이 논전의 주최자는 스페인 국왕 카를 5세.  그는 대서양 너머로 콜럼버스를 파송했던 이사벨라 여왕의 손자였다. 교황의 특사로 온 살바토레 론체리 추기경이 토론을 주재하는 가운데, 성 도미니크회 수사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와 신학자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가 이 논쟁의 대척점에 선다.  세풀베다의 저작 『제2의 데모크라테스, 혹은 전쟁의 정당한 이유에 간하여』라는 책의 출판 허가 여부를 놓고 시작된 이 싸움은 인디오들의 처우 개선 문제로까지 확대되어 식민지 통치와 관련이 있는 전 유럽의 시선을 바야돌리드로 모아 놓았다. 논쟁의 요지는 아메리카에서 발견된 인디오들이 인류에 속하는지를 판단함으로써 정복 전쟁과 원주민들을 노예화하는 일이 정당한지 부당한지를 가려내는 것이다.

 

 

 먼저 당대의 석학인 세풀베다(1494~1573)박사가 아메리카 대륙의 소유권이 유럽인, 특히 조국 에스파냐에게 있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하루에 걸쳐 발언했다. 세풀베다가 의거했던 책은 세 가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그는 이 책의 라틴어 번역자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그리고 『성경』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적 노예상태에 관한 이론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죄에 대한 징벌로서의 노예상태에 관한 이론에 비추어 볼 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을 뿐, 평등한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가 주장하는 논거는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① 인신공양에서 잘 드러나듯이, 원주민은 우상을 숭배하고 또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죄를 저질렀다.

② 원주민은 천성적으로 야만적이고 미개한데, 이는 어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적 성품을 갖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완전히 부합한다.

③ 따라서 군사적 정복은 원주민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④ 그 뿐만 아니라 군사적 정복을 통해 신체가 나약한 원주민을 보호할 수 있다.

 

이어서 라스카사스(1484~1566)신부가 발언했다.  라스카사스는 1502년 콜럼버스의 두 번째 여행에 아버지와 함께 동행하여 ‘신대륙’과 인연을 맺었다. 라스카사스는 미리 준비한 반론을 닷새에 걸쳐 읽어 내려갔다. 사안이 중대했기에 오히려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한 줄의 발언이 종교재판의 화형대로 끌고 가는 밧줄이 될 수도 있었다. 사상 최대의 물권과 더불어 논자의 목숨이 걸린 논전이었다.

라스카사스 신부 역시 성경적 표준에 따라 반론을 펼쳤다. 아메리카 대륙의 물권을 원주민의 범죄를 근거로 박탈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땅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가나안인들의 우상숭배에 따른 결과가 아니었다. 그 이전에 신과의 약속이 있었다. 이에 비해 ‘신대륙’은 유럽인들의 가나안일 수 없다. 아즈텍과 잉카의 찬란했던 도시들이 보여준 공동체의 모습을 보라. 기독교로의 개종은 중요하지만 이미 발달된 공동체가 있는 만큼 반드시 동의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오로지 평화적인 수단만이 동원되어야 한다. 영토에 대한 법적 정당성을 가질 때만이 군사적 수단이 동원될 수 있으며, 교황이나 기독교 군주가 보편적인 정치적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메리카를 군사적으로 정복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 라스 카사스의 결론이었다.  라스카사스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원주민의 예술, 학습 능력을 보면 결코 잔인하거나 비인간적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이성적인 존재이다.

② 회교도와 유대교도 역시 비기독교도이지만 억압과 강제 노동에 저항할 권리가 있듯이, 원주민 또한 저항권이 있다.

③ 아메리카 원주민만 우상을 숭배하고 인신공양을 드린 것은 아니다. 고대 스페인, 그리스, 로마에서도 우상을 숭배하였으며, 어떤 형식으로든 인신공양이 있었다.

④ 인신공양을 금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은 무력이 아니라 가르침과 설득이다.

 

 

  [ 라스카사스 신부 Félix Parra, , 1875 oil on canvas, Museo Nacional de Arte]


논쟁은 며칠 동안 계속된다. 도중에 세풀베다는 인디오들의 야만성과 우상 숭배를 입증하는 증거물로 날개 달린 뱀, 즉 아스텍의 신 케차코아틀의 석상을 제시한다. 교황 특사는 사전에 신대륙에서 데려온 인디오들을 마치 살아 있는 표본처럼 회중에게 보여 준다. 신대륙에서 온 식민지 개척자 두 명도 교황 특사의 허락을 얻어 논쟁에 참석한다. 그들은 시행 중인 식민 지배 제도가 폐지될 경우 에스파냐에 경제적 재앙이 닥칠 것임을 강조한다.

 

   [ 드 브리(Theodor de Bry, 1528-1598)의 판화. 맹견을 동원하여 파나마 원주민을

     학살하는 발보아.       독일에서 출판된 이 판화는 ‘흑색선전’을 널리 유포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교황의 이름으로 특사가 평결을 내린다. 인디오들은 영혼과 이성을 지닌 온전한 인간이다. 따라서 그들을 비인간적으로 학대하고 부당하게 착취하는 행위는 중단되어야 마땅하다. 논쟁은 일견 라스카사스의 승리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뜻하지 않은 결정이 내려진다. 인디오들을 노예로 삼을 수는 없게 됐지만, 그 대신 더 야만적이고 동물에 더 가까운 존재들을 노예화하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책의 끝부분에서 인디오의 노동력을 대신할 대안으로, 아프리카 '흑인'의 희생이 예감되어지는 채 소설은 끝난다. 

 

 

 

[목테수마가 코르테스를 만났을 때. 코르테스 뒤에 흰옷을 입고 서 있는 여자(그림 오른쪽)가 코르테스의 통역관이자 정부인 말린체(Malinche)이다. 말린체는 아스테카 제국으로부터 핍박받던 틀락스칼라(Tlaxcala) 출신으로, 아스테카 제국을 멸망시키는 데 필요한 갖가지 정보를 스페인군에게 제공하였다. 코르테스 정복 이후, 아스테카인들은 콰우테목(Cuauhtemoc)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저항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현대에 와서는 라스카사스 신부를 ‘원주민의 옹호자’ 또는 ‘최초의 해방신학자’라고 부른다. 현실에서는 패배하고 역사에서는 승리한 셈이다. 그러나 세풀베다와 라스카사스 신부의 차이란 결국 방법론의 차이에 불과하다. 라스카사스 신부도 원주민을 기독교 세계로 동화시키고, 나아가서는 식민지배 체제 속으로 편입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었다. 다만 교화와 같은 온건한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고 역설한 점에서 무력 정복이라는 확실하고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한 세풀베다와 다를 뿐이다.

 

[바야돌리드 전경(16세기)] 


아메리카 대륙의 소유권에 관한 논쟁은 ‘신대륙’에서의 ‘대량학살’에 대한 평가와 직결된다.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땅에 대한 소유권조차 가질 수 없다고 여겨진 사람들에게 생명권인들 존중될 것인가? 이 책은 1492년부터 1560년 사이 ‘신대륙’에서 약 4,000만명이 사라졌다는 통계를 제시한다. 하루 평균 1,611명이 죽었다는 또 다른 통계도 나온다. 여기엔 유럽에서 전파된 세균에 면역성을 갖추지 못한 원주민들의 죽음이 포함돼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량몰살에 대한 유럽의 책임은 분명하다.

 '바야돌리드 논쟁'은 몇 백 년 전의 사건이지만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메커니즘을 노정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시사를 던져 주고 있다.

이 작품이 쓰여진 것은 9·11 테러도 있기 훨씬 전이지만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서구문명의 다른 문화에 대한 포용력이란 것이 탐욕 앞에서 얼마나 형편없이 쭈그러들곤 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세풀베다가 아메리카 인디언과 인디언이 믿는 신을 ‘악마’라고 부르는 장면의 대사는 현재 미국을 이끌고 있는 큰형님의 주장을 연상케 한다.

또한 논쟁의 과정을 세세히 들여다보면 이라크 전쟁, 인종 차별주의, 성차별, 일본의 신군국주의, 외국인 노동자 문제 등 현대 사회의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한 깊은 성찰을 유도할 뿐만 아니라, 논증의 기술이며 형식 논리의 맹점, 이상과 현실이 대립하는 양상 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지은이 : 장 클로드 카리에르

1931년 프랑스 남부 랑그독 지방의 오르브 강변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포도 재배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파리로 올라가 라카날 고등학교와 프랑스 최고의 명문 에콜 노르말을 졸업했다. 문학사 학위를 받은 뒤 역사학 연구의 길로 들어섰으나, 그림과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나 연구자가 되는 에콜 노르말의 전통적인 진로를 포기했다.

1957년 소설 『도마뱀』을 발표하면서 작가로 데뷔한 그는 이내 영화의 거장들을 만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가 가장 먼저 만난 감독은 피에르 에테였다. 이 감독의 두 성공작 『사랑에 빠진 남자』(1963)와 『요요』(1965)의 시나리오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1964년에는 스페인의 명감독 루이스 부뉴엘과 함께 『하녀의 일기』를 만들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1983년 부뉴엘이 사망할 때까지 19년 넘게 협력하면서 『메꽃』(1967), 『부르주아 계급의 은근한 매력』(1972),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 등과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카리에르는 위대한 문학 작품을 시나리오로 각색하는 데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의 각색을 통해 나온 영화로는 독일의 명감독 폴커 슐뢴도르프가 연출한 『양철북』(1979, 귄터 그라스의 동명 소설 각색)과 『스완의 사랑』(1983,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각색)과 『마왕』(1996, 미셸 투르니에의 동명 소설 각색), 폴란드 감독 안제이 바이다의 『당통』(1982, 뷔히너의 희곡 ‘당통의 죽음’을 각색),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8, 밀란 쿤데라의 동명 소설 각색), 장 폴 라프노 감독의 『시라노 드 베르주락』(1990, 에드몽 로스탕의 동명 희곡 각색)과 『지붕 위의 경기병』(1995, 장 지오느의 동명 소설 각색) 등이 있다. 일본의 고다르라 불리는 오시마 나기사의 『막스 내 사랑』(1986), 체코 태생의 미국 감독 밀로스 포먼의 『발몽』(1989,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를 각색), 영국의 피터 브룩이 만든 영화 『마하바라타』(1990)의 시나리오를 쓴 사람도 카리에르이다. 프랑스 영화의 거장 장-뤼크 고다르와는 1980년 『재주껏 달아나라』(국내 개봉영화 명 : 인생)>를 함께 만들었다. 1983년에는 『마르탱 게르의 귀향』으로 세자르 최우수 시나리오 상을 받았고, 1989년에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오스카 최우수 각색상을 받기도 했다.

처녀작  『도마뱀』을 낸 뒤로 소설 창작을 중단했던 카리에르는 1990년대에 들어와 다시 소설을 내고 철학과 종교에 관한 에세이나 대담집을 출간했다. 그럼으로써 여러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전방위 작가의 면모를 온전히 드러냈다. 1992년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소설『바야돌리드 논쟁』을 발표한 데 이어, 1993년에는 소설 『점성술가 시몬』을 냈다. 이듬해에는 달라이라마와 대담한 내용을 기록한 『불교의 힘』을 출간하여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1998년에는 움베르토 에코 등과 함께 『시간의 종말에 관한 대담』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