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冊
<폴 오스터>의 『환상의 책』은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묻고 있는 소설이다. 재기 넘치는 언어, 도회적인 감성, 아방가르드적 글쓰기로 요약되는 <오스터>의 작품은 사실과 환상을 절묘하게 뒤섞어놓음으로써 삶의 근원적 의미를 되묻게 만든다. 미스터리에 쌓인 사건, 방향감각을 상실한 인물, 드라마세트와 같은 배경 등 그의 소설에 나오는 비현실적인 요소들은 오히려 현실의 다층성을 지시하면서 현대인들의 마비된 감성에 파문을 일으킨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진 무성영화 배우 헥터 만과 우연한 계기로 그의 과거와 현재를 추적해 가는 대학교수 데이비드 짐머의 삶을 그리고 있다.
비행기 추락사고로 아내와 두 아들을 잃고 슬픔과 절망에 빠져있던 대학 교수 데이비드 짐머는 우연히 TV에서 헥터 만이라는 무성영화 배우의 코미디 연기를 보고 웃음을 되찾는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삶의 의욕를 되찾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짐머는 그 때문에 헥터 만의 모든 영화를 찾아볼 결심을 하게 된다.
그로부터 짐머는 헥터 만의 모든 영화를 찾아, 미국과 유럽 등지를 돌아다니며 헥터 만의 작품을 섭렵하고 그에 관한 최초이자 유일한 연구서를 출간하기에 이른다. 책을 출간한 후 짐머에게 헥터 만의 부인이라고 주장하는 인물로부터 편지가 한 통 배달된다. 하지만 헥터 만은 1929년 어느날 홀연히 사라진 이후 생사조차 불분명한 상태. 편지의 내용은 60년간 행방이 묘연했던 헥터 만이 살아 있고, 짐머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편지 내용에 반신반의하는 짐머에게 어느날 앨머라는 묘령의 여인이 찾아오면서 소설은 헥터 만의 진실에 접근해간다.
앨머는 헥터 만이 뉴멕시코의 사막 한가운데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을 영화를 만들었다고 전하며 그를 만나기 위한 여행에 동행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 여행이 시작되면서 파란만장했던 헥터 만의 삶이 소개되고, 짐머는 노인이 된 채 프리다 스펠링이란 여성과 함께 살고 있는 헥터 만을 잠시 조우하지만 그는 곧 숨지고 그의 영화는 프리다에 의해 소각된다. 소설 속에서 헥터 만이 만든 것으로 설정된 영화에 대한 오스터의 정밀한 묘사는 이 작품의 압권으로 꼽힌다.
시종 흥미진진한 전개로 현실과 환상을 교직시키고 있는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 한 인간의 삶의 흔적이 완전히 말소된다면 그 사람은 과연 살았던 것인가를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작가는 헥터 만이 출연했던 영화필름이 어느 곳엔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남겨놓고 있지만, 이는 비극적 결말에 대해 조금이나마 독자들을 위로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우연과 비극, 그로 인한 삶의 완전한 무화(無化)야말로 이 작품의 진정한 메시지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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