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거포스트, 1663
<이언 피어스>의 최고작인 『핑거포스트, 1663』은 내란과 혁명, 공화정의 실험으로 점철된 17세기 영국을 무대로 과학·의학·신학·인식론을 종횡무진 오가며, ‘왕권’과 ‘의회주권’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대, ‘연역’과 ‘귀납’이 충돌하던 시대, ‘종교적 억압’과 ‘인간의 이성’이 충돌하던 세기를 치밀하게 그려낸다. ‘살인사건’이라는 미스터리는 ‘왕정복고를 둘러싼 세기적 음모’라는 역사적 진실에 닿아 있고, 역사적 진실은 인간 존재의 진리에 닿아 있다.
이 소설은 네 개의
서로 다른 증언이 모여 하나의
정교한
이야기로 짜여지는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이야기는
1663년, 아직 쌀쌀한 어느 이른 봄날 오후, 마르코 다 콜
라라는 베네치아 신사가 옥스퍼드에 도착하면서 시작된
다. 이 베네치아 신사는 위대한 화학자 로버트 보일을
찾아간다. 그 후 콜라는 철학자 존 로크, 사학자 앤소니
우드, 의학자 리처드 로어, 수학자 존 월리스 등 옥스퍼드
의 화려한 저명인사들과 접촉한다. 콜라는 특히 사라 블
런디라는 범상치 않은 여인에게 관심을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옥스퍼드 뉴 칼리지의 신학 교수 그
로브 박사가 의문의 독살을 당하고, 살인사건을 진술하는
네 명의 화자가 등장한다. 제1부를 증언하는 베네치아
신사 마르코 다 콜라, 제2부를 증언하는 악명 높은 반역
자의 아들 잭 프레스콧, 제3부를 증언하는 암호 해독가
존 월리스, 제4부를 증언하는 사학자 앤소니 우드가 그들
이다. 네 명의 증언 중 진실에 접근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뿐......
2부의 증언은 1부의 증언을 뒤집고, 3부의 증언은 1부와 2부의 증언을 뒤엎는다. 마지막 4부의 증언은 앞서의 모든 증언을 전복하며 나아간다. 살인사건의 진상은 17세기 영국과 유럽 군주 간의 정치적 음모로까지 확대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진실의 상대성’에 관한 이야기다.
4부에 등장하는 화자의 최종 증언에 따르면, 이 사건은 그로브 박사로부터 모멸감을 느낀 한 향토사학자가 앙갚음하려다 실수로 살인까지 저지른 것이었다.
또 등장 인물들 사이에 오간 의문의 암호편지는 영국왕 찰스2세가 쓴 것으로 드러났다. 프로테스탄트의 수장인 영국왕이 1663년에 국민들 몰래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국민을 개종할 것을 약속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정치·종교적 상황을 고려하면 핵폭발의 위력을 가진 메시지다.
이 소설은 방대한 인문학적 상상력과 추리가 절묘하게 녹아 있는 대단히 지적(知的)인 미스터리이다. 특히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방대한 분량만큼이나 육중한 울림을 선사하며 긴 여운을 남긴다.
책의 원제는 “An Instance of the Fingerpost”로 ‘길안내 표시가 가리키는 예’라는 뜻으로 17세기 귀납법을 확립한 베이컨의 저서 ‘노붐 오르가눔’에 나오는 말이다. 어떤 문제가 미궁에 빠졌을 때 오로지 한 길을 가리키며 모든 형태의 증거를 압도하는 단일한 증거를 보여준다는 의미다.
이언 피어스는 독특하게도 『노붐 오르가눔』에서 베이컨이 주장한 우상론, 즉 인간 지성이 진리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는 네 개의 우상을 각 부의 모티프로 삼고 있다. 제1부는 ‘시장의 우상’, 제2부는 ‘동굴의 우상’, 제3부는 ‘극장의 우상’이다. 그러나 제4부는 ‘종족의 우상’이 아니라 ‘핑거포스트’(손가락질 모양의 길안내표시)이다. 제4부의 증언만이 유일하게 완벽한 증언이라는 뜻인가. ‘핑거포스트’는 ‘종족의 우상’에 사로잡힌 앤소니 우드의 망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핑거포스트’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영원히 독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사실 이 책은 수년전에 『옥스포드의 4증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으나, 독자들에게 별로 사랑을 받지 못해 절판이 되었다가 요즘 지적추리소설의 붐에 힘입어 제명을 바꿔 달고 다시 출간된 책이다.
저자 <이언 피어스(Iain Pears)>는 영미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중견 작가이다. 그는 뛰어난 미술사가이자 저널리스트이며, 역사·예술·종교·철학 등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췄다. 바로크 시대가 전개된 과정을 탐구한 그의 역저 『회화의 발견』은 미술사에 관한 최고의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미술사에 관한 깊은 조예를 바탕으로 『라파엘로 사건』 『티치아노 위원회』 『베르니니 흉상』 『최후의 심판』 『조토의 손』 『죽음과 부활』 『결백한 사기』 등 ‘미술사 미스터리’ 연작과 『스키피오의 꿈』 『핑거포스트, 1663』을 발표, 언론의 찬사를 한 몸에 받으며 명성을 얻었다. 특히 1997년 발표한 일곱 번째 소설인 『핑거포스트, 1663』은 이언 피어스의 대표작으로 24개국에 번역 출간되어 전세계 독자를 사로잡으며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55년 8월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의 와덤 칼리지를 졸업했으며, 울프슨 칼리지에서 미술사 연구로 1982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20대 초반에는 이탈리아,그리스,프랑스 등지에서 영어 교사로 일했고, 1982년부터 1990년까지는 ‘로이터 통신’ 특파원으로 로마,파리,뉴욕,런던에서 활동했다. 뉴욕 특파원 시절에는 예일 대학의 인문과학연구소에서 특별연구원을 지냈다. 1990년부터 프리랜스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영국 BBC와 독일 ZDF 방송의 컨설턴트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