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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본문
장미의 이름
『장미의 이름』은 뭐라고 단정짓기 어려운 형식의 소설이다. 수도사 <아드소>의 수기형식으로 씌여진 이 소설은 프랑스 "메디치상" 및 이탈리아 "스트레가상"을 받았으며 1989년에 영화(주연 : 숀코네리, 머레이 에이브럼스)로도 제작되어 절찬을 받은 바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번역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결과 아직까지 우리 나라에서 번역된 작품 중 번역이 가장 잘된 소설이라는 평을 받았다.
장미의 이름』은 중세의 한 수도원에서 벌어진 연쇄살인 사건 을 추리기법으로 다루고 있다. 때는 1327년, 교권과 황권이 첨예하게 대립되던 시기에 영국의 윌리엄 수도사가 모종의 임무를 띠고 이탈리아의 어느 수도원에 도착한다. 윌리엄수도사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정신의 소유자로 지적 호기심이 강하고 일면 고집스러운 면이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날부터 수도원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연쇄 살인이 묵시록에 예언된 내용대로 벌어진다. 첫날은 폭설 속의 시체, 둘째 날은 피 항아 리 속에 처박힌 시체, 셋째 날은…
윌리엄수도사와 아드소는 수도원측의 여러 가지 방해를 받으면서도 사건의 진실에 서서히 다가간다. 마침내 윌리엄수도사는 그 사건이 수도원의 장서관에 숨겨진 비서(秘書), 곧 지금은 사라져 버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부 ‘희극론’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밝혀낸다. 그러나 비밀의 열쇠를 쥔 책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밤마다 유령이 나타난다는 장서관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장서관의 미궁을 꿰뚫는 거대한 암호를 풀어낸 윌리엄 수도사는 어둠 속에서 수도원을 지배하는 광신의 정체를 응시하고 서서히 그 중심부에 접근하게 되는데....
또 한편으로는 교권의 대표자격으로 과거 숙적이었던 베르나르드 귀 일행이 수도원에 도착하여 윌리엄측과 신학적 논쟁을 벌이며, 치열한 세력싸움이 병행된다.

<멜크 수도원>
소설의 구성과 전개는 윌리엄 수도사가 연쇄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을 기독교 성경의 ‘요한계시록’의 구성에 맞추고 있다. 여기서 돋보이는 것은 흥미진진한 사건의 전개, 윌리엄의 논리적 추리 능력, 배경으로 삽입된 중세 문화와 풍속, 정치적,종교적 상황 등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서, 우리들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지적 유희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에코가 강조하려는 핵심은 다른 데 있다. 이 책은 사실 추리소설의 형식을 띤 ‘철학적’ 소설이며, 배경은 중세의 수도원이지만 폭넓은 문화 비판을 통해 현재적 의의를 살려 내고 있다. 이단에 대한 탄압과 신학적·형이상학적 독단, 마녀사냥, 종교재판으로 상징되는 중세의 지배질서는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갖가지 지배이데올로기, 언론조작, 광기 어린 매카시즘 등을 통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멜크 수도원 내부>
흔히 거론되는 현대 문명의 위기와 인간성 상실은 우리에게 새로운 ‘계몽’을 요구한다. 근대의 경험적·과학적 정신이 중세의 암흑을 꿰뚫은 빛이었다면, 우리 문제를 해결해 줄 정신적 빛은 어디에서 올 것인가 그것은 결국 인간 자신에 대한 진지한 반성,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열린 자세, 독단에 빠지지 않는 합리적 탐구를 요구할 것이다. 이 소설의 화자이자 윌리엄의 제자였던 앗조가 수도원의 폐허 위에서 내뱉는 독백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아직도 사라져 버린 장미의 ‘이름’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1932년 이탈리아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난 현대의 가장 저명한 기호학자이며, 동시에 뛰어난 철학자, 역사 학자, 미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볼로냐 대학의 교수이다. 그는 아퀴나스 의 철학에서부터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지식을 쌓은 엄청 나게 박식한 사람이다. 전 세계 수십 개 대학에서 강의한 바 있는 에코 는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는 물론 영어,프랑스어에 무불통달하고 독일어, 스페인어, 포루투갈어, 라틴어, 그리스어,러시아어까지 해독하는 지독한 '공부벌레'이자 '언어의 천재'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의 세기말적 위기를 소설로 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에코는 출판사에 근무하는 여자 친구로부터 추리소설을 써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고 이를 계기로「장미의 이름」을 2년 반에 걸쳐 썼다고 한다. 에코의 이 책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바치는 하나의 찬사로서 그 자체로 완벽한 본격 추리소설이다.
그뿐 아니라 이단을 불로 태워 죽이고 곧 세계의 종말이 올 것이라는 광신과 미신으로 가득한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함으로써, 에코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을 강요당하는 시대에 지식인이 겪은 혼란과 무력감을 그려 내고, 거기서 벗어나는 길도 제시하려 했다. 그의 작품의 난해성이 독자들로부터 때로 불평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독특한 '에코적' 서술은 독자에게 다채롭고 흥미 진진한지적 체험을 가능케 한다.
저서로는 『장미의 이름』외에도 『푸코의 진자』『전날의 섬』『바우돌리노』등이 있고,『폭탄과 장군』『세 우주 비행사』등 두 권의 동화와 이론서로는『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의 문제』『열린 작품』『기호학 이론』『논문 작성법 강의』『장미의 이름 창작 노트』『대중의 슈퍼맨』『해석의 한계』『소설 속의 독자』『기호와 현대 예술』『해석이란 무엇인가』『중세의 미와 예술』『소설의 숲으로 여섯 발자국』『무엇을 믿을 것인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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