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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Flughunde]

[책갈피] 2007. 10. 5. 15:51
 

박쥐[Flughunde]



<파트리크 쥐스킨트>의향수』가 냄새와 광기에 얽힌 이야기라면, <마르셀 바이어>의 『박쥐』는 소리와 광기라는 주제를 다뤘다.

이 소설은 제3제국(나치 독일) 시대를 배경으로 인간의 목소리라는 소재를 집중적으로 파헤치면서 궁극적으로는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작가는 역사학자들처럼 전체를 조망하진 않지만 그들이 포착할 수 없는 틈새를 독특한 서술 관점으로 읽어 내고 있다.

 

나치 독일의 신화가 여론 조작과 대중 선전 선동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 시대에 목소리와 그 전달 매체의 기능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저절로 답이 나온다. 나치 시대 기록영화들을 보면 히틀러와 선전상 괴벨스가 독특한 목소리와 화술로 군중을 열광시키는 장면을 자주 만날 수 있다. 그래도 당시에 음향기의 혁신적인 발명과 발전이 없었다면, 또 방송이라는 대중 매체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처럼 엄청난 히틀러의 정치적 성공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작가는 나치 독일을 가능하게 한 이 같은 역사 이면의 사실들을 허구로 풀어내고 있다.

 

 

나치 시대에 히틀러 버금가는 권력과 인기를 누렸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 몇 년 전에 독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히틀러의 공범들』을 쓴 역사학자이자 방송인 <귀도 크놉>은 괴벨스를  “히틀러의 제1종복이자 나치의 세계정복 계획에 불을 붙인 방화범”으로 규정했다.  괴벨스는 다리 한 쪽을 절었을 뿐 아니라 키도 작고 왜소한 인물이었지만 천재적인 언어 감각과 독특한 매력으로 대중을 사로잡았고 여성편력도 대단했다.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괴벨스는 딸 다섯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전쟁 말기에 히틀러가 자살하자 괴벨스는, 원래 히틀러를 찬양할 목적으로 모두 ‘H“로 시작하게 이름 지은 자기 아이 여섯을 독살하고 아내와 함께 자살했다.


나치 요인들의 연설을 녹음하는 음향기사 카나우, 히틀러의 제 1종복이었던 괴벨스의 맏딸 헬가.  이들은 서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변상황을 인식하는 1인칭 서술자의 목소리를 통해 이 소설을 끌고 나간다. 이들의 이야기는 마치 큰 타원을 그리는 행성의 궤적처럼, 만났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나곤 한다. 하지만 그들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에게 너무나 이질적이다.

인간의 목소리 분석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카나우는 갖가지 상황에 처한 인간의 목소리를 녹음하겠다는 일념으로 총알과 포탄이 쏟아지는 최전선에서도 죽어가는 병사들의 신음소리를 담으려 뛰어다닌다. 카나우는 집단 행동과 군중 심리를 혐오하는 가장 반 나치적인 인간형. 군대식 명령조와 땀냄새, 음담패설과 적나라한 과시욕으로 가득한 남자들의 세계를 견뎌내지 못하는 이 카나우가 어릴 때부터 동경해 온 세계는 마다가스카르 섬에 서식하는 개박쥐들의 삶이었다.  박쥐과에 속하지만 얼굴이 개처럼 생겨 개박쥐라고 불리는 이들은 어느 세계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는 주인공의 이중적 삶을 상징한다.

 

[개박쥐] 

 

 

이 소설에는 밤과 어둠, 신체장애의 모티브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들은 박쥐와 마찬가지로 ‘자유’라는 긍정적인 개념과 결합된다. 드레스덴 동물원에서 햇빛 때문에 떼죽음을 당한 박쥐들이나 온종일 자연의 시간을 가늠할 수 없게 하는 지하 벙커의 인공 조명 같은 예처럼, 여기서는 오히려 대낮의 햇빛이나 조명 따위가 부정적 이미지를 지닌다. 카나우가 자기 개인의 연구에 몰두하는 시간은 언제나 고요한 밤이며,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듣는 초능력을 지니고 밤의 세계를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박쥐를 동경한다.

이런 철저한 개인주의자가 어떻게 나치에 협력해 전범으로 전락하는가를 설득력있게 그려낸 점이 바로 이 작가의 뛰어난 역량이다. 작가는 카나우가 혐오하는 ‘사나이 세계’를 집단적 광기의 역사를 생산하는 주체로 규정한 다음, 그 세계를 거부하고 그로부터 도피하려는 카나우의 노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군대의 집단 생활을 피하려다 어쩔 수 없이 빠져든 함정이 바로 또 다른 나치 범죄의 현장, 그러니까 학문의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생체 실험을 통해 음성 기관을 연구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생체 실험의 대상은 물론 강제수용소 포로들이었고 카나우는 의사들의 실험을 녹음하는 작업을 하며 나치의 공범이 되고 만다.

 

 

작가는 카나우를 통해 ‘동시대 역사의 죄과에서 한 인간이 온전히 무죄로 남아 있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집단의 광기에 개인주의로 대항하는 것이 결코 안전한 대응책이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성을 지키는 일을 위협받아야 하는 암울하고 전도된 시대에 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무엇일까?


독일 작가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제까지 나치시대의 과거를 끊임없이 문학에 담아왔다. 이점이 일본 작가들과는 다른 점인데, 세계 침략자로서 죄과를 잊지 말고 그릇된 과거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해 미래를 투명하게 하자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양철북』을 쓴 <귄터 그라스>로 대표되는 작가 대부분은 어린 시절에라도 전쟁을 겪은 세대였고, <마르셀 바이어>처럼 전후 20년이 지나 태어난 작가가 과거의 역사와 정면으로 대결해 탁월한 문학적 성과를 이룩했다는 놀라움 때문에 이 작품은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었고 바이어는 현재 독일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저자 | 마르셀 바이어]

1965년 독일 남서부의 작은 도시 타일핑엔에서 태어났다.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시인, 번역가, 편저자, 에세이스트,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1989년부터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문학 평론을 기고하고 있으며, 1991년부터는 「스펙스(Spex)」지에 음악 평론을 쓰고 있다. 1991년 쾰른 시에서 수여하는 '롤프 디더 브링크만 작가 장려금'을 비롯하여 '클라겐푸르터 에른스트 빌너상'을 수상했고, 1992년에는 '베를린 문학 장려금' 및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장려금', 1993년에는 '니더작센 재단'으로부터 『박쥐(Flughunde)』 집필을 위한 작가 지원금, 1995년에는 '비더스도르프 작가 장려금'을 받았다. 그의 데뷔 소설 『인육(人肉)』은 「쥐트도이췌 차이퉁」지로부터 '탁월한 대작'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두 번째 장편소설 『박쥐』는, 「옵세르바퇴르」지로부터 '극단의 미학의 금자탑'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저서에 소설 『강박관념』(1987), 시집 『워크맨 낀 여자』(1991), 『브라우볼케』(1994), 장편소설 『인육(人肉)』(1991), 『박쥐』(199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