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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영혼 (Les A'mes Grises) 본문
회색 영혼 (Les A'mes Grises)
간결한 문체, 강렬한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클로드 필립>의 『회색 영혼』은 내가 올해 읽은 소설책 중에서 단연 ‘백미’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소설을 읽고 감동이니 감명이니 하는 표현은 내겐 좀 어색하다. 그냥 책을 읽고 나서 “참 잘 쓴 글이구나”, 아니면 “정말 대단한 소설이네”하고 느끼는 정도다. 이 작품은 정교한 구성과 작품성이 뛰어난 소설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작자의 글을 풀어가는 방식이 내 맘에 쏙 들었다.
『회색영혼』은 은퇴한 경찰관인 ‘내’가 話者로서 기억을 떠올리며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며 기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기억은 자기고백을 통해 완성된다. 사건에 대한 기억의 주된 대상이 타자들이라면 고백은 말 그대로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 속죄와 회한의 과정이다.
이 소설은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17년, 전쟁을 비껴간 프랑스 동부의 작은 마을. 차갑게 얼어붙은 겨울 강가에서 어린 소녀의 시체가 발견된다. 죽은 아이는 '벨 드 주르‘(‘햇살처럼 예쁘다’는 뜻을 가졌다), 마을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소녀로 이제 겨우 열 살이다. 모두가 사랑했던 순백의 영혼을 죽인 자는 누구인가? 그녀의 아버지는 V(地名)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당연히 소설은 이 식당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냉철한 영혼의 소유자로 검사인 ‘데스티나’, 마을의 선생님으로 근무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리지아 베르아렌’, 주인공의 아내인 ‘클레망스’와 가죽 아줌마로 불리며 알콜중독자였던 ‘조세핀’, 뚱뚱보이며 식탐의 습관이 있는 판사 ‘미에르크’와 그와 죽이 잘 맞았던 뒤레퓌스 주의자인 ‘마치예프 대령’, V시의 식당 주인이자 벨의 아버지인 ‘부라슈’ 등등. 이 모든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이어진다. 이야기의 서술은 술에 취한 주인공처럼, 뒷부분을 먼저 이야기했다가 다시 앞으로, 또 다시 뒤로 돌아갔다가 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인 ‘나’는 누가 범인인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살인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마을의 모든 사람들 뒤에 숨겨진 얼굴과 그들의 비밀에 대해 하나씩 알게 된다.
'나'는 몇 가지 정황증거를 근거로 검사인 데스티니를 용의자라 확신하지만, 엉뚱하게도 어린 탈영병 둘이 용의자로 몰리면서 사건은 흐지부지 종결되고 만다. 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통해 여론을 무마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해가 일치한 시장, 판사, 타락한 드레퓌스주의자의 야합, 그리고 검사에 대한 끈끈한 동료의식에 의한 암묵적 묵인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였다.
결국 검사가 죽고 방치된 검사의 성채에서 주인공은 한 묶음의 글들을 갖고 나온다. 그 중에는 성채에서 죽었던 여교사의 흔적들이 있는데 그것을 통해 여교사의 죽음에 숨겨져 있던 진실이 밝혀진다. 또한 데스티니가 보여주지 않았던 진실들도 모습을 드러낸다. 이 진실들은 서로 상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진실들은 하나의 그림을 만들기 위한 퍼즐조각처럼 서로를 향해 다가간다. 오랫동안 숨겨지고 방치되어 왔던 진실과 거짓, 외롭고 고독한 인간의 내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누가 범인인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실존적 물음을 던지게 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치밀한 성격묘사를 통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위선, 비겁, 나약을 소름끼칠 정도로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성자도 개새끼도 없다. 인간의 영혼, 그것은 누구에게나 어쩔 수 없이 회색이다. 똑같은 회색 진흙이 하얀 대리석 판 위에서는 검게, 검은 대리석 판에서는 희게 보일 뿐이다.” 필립 클로델은 이와 같은 말로 우리 영혼의 색깔을 회색이라 규정하며 인간 영혼 그 깊은 곳으로 파고든다. 회색은 몹시도 불투명하고 정체도 모호하다. 그렇다면 왜 하필 회색일까? 영혼이란 그냥 그렇게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보다는 차라리, 인간 존재의 조건이 어느 정도 ‘죄와 악’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작가 소개 : 필립 클로델]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다. 1962년 프랑스 동발-쉬르-뫼르트에서 태어났다. 『Quelques-uns des cent regrets (1백 번의 후회)』로 ‘마르셀 파뇰’ 상을 수상했으며, 『J'abandonne (포기)』로 프랑스 ‘텔리비지옹’ 상을 수상했다. 『Le bruit des trousseaux (열쇠 꾸러미 소리)』를 출간했으며, 2003년 『Les petites mecaniques (사소한 역학)』으로 ‘공쿠르 드 라 누벨’ 상을 수상했다.
『회색 영혼』은 2003년 ‘르노도 상’ 수상작이며, 같은 해 ‘공쿠르 상’과 ‘페미나 상’ 심사에서도 최종 수상작과 각축을 벌인 작품이다. 2004년 ‘ELLE 문학상’, LIRE 紙 선정 '올해 최고의 책' 등 권위 있는 프랑스 문학상을 석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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