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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본문
금 각 사
『금각사』는 1956년 1월부터 10월까지 잡지 「신조」에 연재된 작품으로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취재한 '시사 소설'이다. 금각을 방화한 승려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로 <미시마 유키오>의 대표작이다.
<저자 소개>
미시마유키오는 1925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동경 제국대학 법학부를 나와 『해조음』으로 신조사 문학상 수상, 희곡 『흰개미의 집』으로 기시다 연극상을, 그리고 『금각사』로 요미우리 문학상 수상했다. 을 수상했다. 노벨상 후보로도 1964년, 1967년 두 번 추천 되었다. 20대에 유키오는 허약한 체질과 왜소한 체구, 그리고 예민한 감수성으로 인하여 '미래에 대한 불안'과 일상생활에 대한 불안'의 시기를 겪는다. 그러다 30대를 맞이하여 급격히 육체와 지성을 중시하는 문학세계로 돌입하게 된다. 이 시기는 '여성적 원리'로부터 '남성적 원리'로의 이행이며, '자기 개조의 시도'이다. 『금각사』는 미시마 문학의 이와 같은 이행의 과정을 살피기에 적절한 작품이다.
<작품 소걔>
이 소설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했다. 이 소설이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 이 소설은 실제 있었던 금각사 방화 사건을 소재로 하여 한 인간의 미(美)에 대한 집념을 그려내고 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소설은 아름다움을 박제시키려 했던 한 인간의 내면심리와 극단적인 행동을 통해 이러한 물음표를 던져 준다.
미조구치라고 하는 소설의 주인공은 스스로 자신은 특별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 주인공의 비정상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내면은 ‘정상인'이라고 불리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아주 생소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내면에 누구나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 심미적인 기질이다. 다만 미조구치는 그러한 기질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많다. 윤리나 관습이나 법규 같은 것, 보통 사람의 내면에 각각 제 영역을 확보하고 있을 만한 그러한 가치의 자리가 미조구치에게는 없는 것이다. 아니, 없다기 보다는 그러한 모든 가치를 좌우할 수 있는 어떠한 신적인 절대성이 그의 내면에는 있는 것이며, 그것이 아름다움인 것이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그는 일반인들과 동떨어짐을 느끼게 된다.
추한 외모와 말더듬이라는 장애 또한 그의 평범치 않음을 부각시키는 요소이다. 말을 더듬는 행위는 그의 신체적 장애를 넘어서 감정, 사회인식에 대한 어긋남을 상징하기도 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말더듬이를 은근히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내면이 사회의 그것과 어울리지 못함에 대해 은근히 우월감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인물의 내면은 그가 창녀촌에 가서 느끼는 심리에서도 드러난다.
나는 완전히 보편적인 단위의 남자로서 취급되고 있었다. 아무도 나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나로부터 말더듬이가 벗겨지고, 추한 것과 가난히 벗겨지고, 이렇게 탈의한 뒤에도 수없는 탈의가 쌓여 나갔다. 나는 분명히 쾌감을 맛보고 있었으나 그것이 나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우월감과 소외감이 공존하고 있는 주인공은 이러한 자신에게 경멸이나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존재에게 매력을 느낀다. 그에게 평생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깅가쿠가 그러하며 우이코, 미군창녀 등 그가 끌리는 태도는 그러한 멸시의 모습들이었다.
이해하기 어렵게도 주인공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란 보존되어야 할 것이 아닌 소멸해야 할 것이다. 순간성과 영원성, 그것은 아름다움에 제기할 수 있는 하나의 논제이다. 가시와기와는 달리 주인공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꿈꾸며 순간과 영원과의 사이에서 불안감을 느낀다. 깅가쿠 조차도 영원히 불변하지는 않으리라는 불안감,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은 결국 그가 불을 지르도록 만들고야 만다. 절대적 미의 상징이었던 깅가쿠에서조차 주인공은 불안을 느낀다. 그렇다면 그가 꿈꾸고 사랑했던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불을 지르는 자신의 행위이다.
나의 삶의 의지가 모두 불에 걸려 있다고 한다면 육욕도 그리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나의 그런 욕망이 불의 나긋나긋한 자태를 만들고, 불길은 검게 빛나는 기둥을 투사해서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상냥하게 몸치장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 행위로 인해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비롯한 인간 세계에 떠돌고 있는 불안을 인정하기를 바란 것이다. 언젠가 공습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아무런 흔들림이 없어 보였던 깅가쿠에게 배신감을 느꼈듯이 순간성과 영원성 사이의 불안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는 그에게 용납이 되지 않았고 그는 그 사이의 불안한 틈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이 행위는 불타고 있는 깅가쿠 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이다. 곧 순간의 아름다움을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박제 시키는 행위, 그 아름다움의 소멸이 그에겐 가장 아름다웠던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신이 선물한 인간의 가장 큰 보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맛볼 수는 있지만 분명 천상의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은 바라볼 수 있을 뿐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떠한 아름다움이든 지상의 것은 유한한 것이므로...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 『금각사』의 주인공처럼 그런 유한적인 아름다움을 소멸시킴으로써 영원히 박제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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