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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아메리카인의 이주와 이주 경로
박 병 규
1. 원주민 이주 문제의 단초
언제부터 아메리카 대륙에 인간이 거주하였을까? 그리고 이들은 이 대륙에서 자생으로 발생한 인류였을까? 아니면, 다른 곳에서 이주한 사람들이었을까? 만약 이주했다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들어왔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 지금까지 출현한 가설과 학설은 모든 상상력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는 듯하다.
이 문제는 1492년 서구인이 신대륙에 도착하면서부터 제기되었다. 지금의 관점으로는 터무니없는 얘기처럼 들리지만, 정복 초기 일부 서구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서구인들의 눈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존재였다는 데 이유가 있고, 또 어떻게든 정복하고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주민들이 공식적으로 인간의 범주에 포함된 때는 1537년 교황 바오로 3세가 교서에서 원주민을 인간이라고 선언한 이후이다.
그런데 정복 당시의 기독교 세계관에 따르면 인류는 모두 아담의 후예였다. 아메리카 원주민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만약 원주민이 인간이라면 노아(Noah)의 자손이 틀림없을 터인데, 성서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그런 얘기는 없었다. 원주민이 고대 아틀란티스 대륙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이 역시 증거가 없었다.
2. 베링해협 이주설
원주민의 조상을 둘러싼 이러한 난제에 최초로 합리적인 가설을 내놓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예수회 수도사 호세 데 아코스타(José de Acosta, 1540-1600)였다. 아코스타는 『신대륙의 문물사』(Historia Natural y Moral de las Indias, 1590)에서 원주민들의 조상은 약 2천년 전에 아시아 대륙에서 건너온 수렵민이라고 추정했다.
아코스타 가설의 고고학적 근거는 없었다. 오로지 성서에 근거하여 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상을 설명함으로써 기독교 세계관의 무오류를 입증할 필요성에서 탄생한 추론이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코스타의 가설 수용하였으며, 일부 학자들은 약 4,000-6,000년 전쯤에 베링해협을 건너왔다고 믿어버렸다.
20세기에 들어와 이러한 믿음은 과학적 성격을 띠게 되었는데, 그 단초는 알레스 흐르들리카(Ales Hrdlicka, 1869-1943)의 연구였다. 흐르들리카에 의하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체적 특징은 결코 동일하다고 얘기할 수 없으나 단두(短頭), 단신(短身)과 같은 일부 원주민들의 특징은 몽골로이드와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이주경로에 대해서도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쳤다. 2만 년 전 위스콘신(Wisconsin) 빙하기에 해수면은 지금보다 125m정도 후퇴하였고, 베링해협은 폭 100km이하, 깊이 60m 정도의 해협에 불과했다. 이처럼 베링해협은 카누나 도보로 왕래가 가능하게 되자 아시아 대륙의 원시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베링해협을 건너온 이주민들의 이주 경로와 클로비스]
흐르들리카의 베링해협 이주설은 1930년대 미국의 뉴멕시코 주 클로비스(Clovis) 부근에서 약 11,000-11,500전(B.P.)의 타제 석기가 발굴됨으로써 1950년대 이르러서 학계의 정설로 자리 잡았다. 즉, 빙하기에 아시아 대륙(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원시인들 중 일부는 캐나다 북부에 거주함으로써 에스키모의 조상이 되었고, 일부는 계속 남진하여 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클로비스 유물은 아메리카 대륙의 동물군에 관한 수수께끼를 푸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연구에 따르면, 클로비스의 원주민들은 맘모스 같은 대형 동물 사냥꾼(big-game hunters)이었으며, 이 시기 아메리카에서 말(馬)같은 대형 동물이 사라진 원인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러한 수렵민의 활동 결과라고 여겼다.
하지만 베링해협 이주설은 의문점이 많은 가설이다. 무엇보다도 클로비스와 동아시아(시베리아)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증명하는 고고학적 증거가 없었다. 1977년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난 듯이 보였다. 러시아 학자 모차노프(Mochanov)가 시베리아 사하(Sahka 또는 Yakutia)지방 듀타이(Duktai 또는 Dyukhtai) 동굴에서 발굴한 세형 몸돌 및 양면박리 돌날과 클로비스 유물을 비교하여 양자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주장한 것이다.
모차노프 학설의 핵심은 듀타이 유물의 연대에 있었다. 듀타이 유물은 약 2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므로 이들이 베링해협을 건너 클로비스 유물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스미소니언박물관은 듀타이 유물의 연대를 1만2천-1만 년 전으로 추정한다. 클로비스 유물보다 더 후기의 유물이라는 스미소니언박물관의 추정은 모차노프 학설에 대한 결정적인 반박이었다.
2. 해안 이주설
1997년 칠레 남부의 몬테베르데(Monte Verde) 유적이 고고학계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고대 아메리카 이주민과 이주 경로에 대한 연구와 논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소수 학자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해안 이주설은 학계의 공인을 받은 상태이다. 반면에 베링해협 이주설은 지금까지 누려온 권위를 잃고 여러 가지 가능한 이주 루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칠레의 몬테베르데. 자료 출처: The New York Times]
[칠레의 몬테베르데 유적 발굴 현장]
몬테베르데의 유물은 방사선 탄소 연대 측정을 한 결과 평균 12,500전(B.P.)의 것으로, 클로비스 유물보다 1,000년이나 앞선다. 더구나 이 유적지에서는 가마우지나 앤초비 등 물고기 뼈가 다량 출토된 반면에 육상 동물의 뼈는 조금 밖에 나오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대형 동물 사냥꾼이 아니라 소형 동물 사냥꾼(small game hunter)이었다. 이처럼 몬테베르데 거주민들은 연대기나 생활방식으로 보더라도 베링해협을 통해 이주한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였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떤 경로를 거쳐서 칠레 남단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유력한 가설은 태평양 해안 이주설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동남아나 일본 등에서 배를 타고 알래스카 연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태평양 연안을 따라 계속 남진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여행이 의도적이었는지, 아니면 우연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태평양 연안을 항해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남쪽 지방에 이르렀다는 가정이 당시의 항해술을 고려할 때 가장 개연성이 높은 추정이다.
베링해협 이주설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조금 뜻밖이지만, 고대 아메리카 이주민들이 육지가 아니라 바다를 건너 들어왔다는 가설은 예전부터 있었다. 폴 리베(Paul Rivet)가 1924년부터 주장한 이 가설에 따르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은 시대적으로 수차에 걸쳐 여러 곳에서 건너온 사람들로서 몽골로이드뿐만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인, 멜라네시아(Melanesia)와 폴리네시아(Polynesia)인도 포함되며, 이들은 배를 이용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태평양 연안을 따라 이동했거나 아니면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 등에서 칠레의 파스쿠아 섬(Pascua. 영어로는 Easter Island)을 거쳐 태평양을 건너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몬테 베르데의 유적은 리베의 가설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했다고 할 수 있다.
3. 대서양 이주설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인을 둘러싼 논쟁은 대서양 이주설로 더욱 가열되었다. 이 가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클로비스 유물과 프랑스의 솔류트레(Solutre, 1만8천-1만5천) 유물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최초의 아메리카인은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아니라 유럽에서 건너왔다고 주장한다.
2000년에 미국의 고고학자 스탠포드(Dennis Stanford)와 브래들리(Bruce Bradley)는 클로비스 타제석기가 넓고, 납작하고, 얇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솔류트레(Solutré, Bourgogne du Sud) 구석기 유물과 매우 흡사하다면서, 아마도 스페인 북부 솔류트레(22,000-16,500전)인이 빙하기 대서양을 통해서 신대륙으로 건너왔다는 가설을 내세웠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양 문화 사이에는 4,500년의 시간차가 존재하는데, 이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둘째, 전기 구석기시대에 대서양 항해가 가능한지가 의문이었다. 마침내, 솔류트레 연구의 권위자인 스트로스(Lawrence Guy Straus)가 양 문화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함으로써 대서양 이주설을 둘러싼 논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4. 태평양 이주설
이밖에도 학계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가설이 존재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태평양 이주설이다. 이 가설은 1999년 브라질 사웅 파울루 대학의 월터 네베스(Walter Neves)가 브라질 북동부 피우이(Piaui)주 세하 다 카피바라(Serra da Capivara) 국립공원 내 페드라 푸라다(Pedra Furada, 구멍 뚫린 바위라는 뜻)에서 발견된 두개골에 근거하여 주장했다. 페드라 푸라다 유적은 1970년 이래 브라질 여류 고고인류학자 니데 기돈(Niède Guidon)의 지휘 아래 발굴된 곳으로 방사선 탄소 연대를 측정한 결과 5만전의 유적으로 판명되었다.
[브라질 카피바라 국립공원의 구멍 뚫린 바위]
[페드라 푸라다의 그림]
1999년 브라질 사웅 파울루 대학의 월터 네베스는 이곳에서 발굴된 유골(일명. Luzia)을 복원한 결과, 뜻밖에도 흑인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주 경로에 대해 과감한 가설을 제시하였다. 네베스는 브라질에서 13,500km나 떨어진 오스트레일리아 서부의 킴벌리(Kimberley) 동굴에 그려진 배에 근거하여, 이들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건너왔다고 주장한다. 즉, 아메리카 대륙의 최초의 인간은 5만 년 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건너온 흑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흑인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상일까? 그렇지 않다. 네베스의 대답에 따르면, 이 흑인들은 7,000년 전 아시아에서 건너온 몽골로이드에 의해 사라졌다는 것이다.
5. 논쟁의 의미
최초의 아메리카 이주민에 대한 다양한 설의 등장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리고 논쟁을 지속시키는 동기와 추동력은 무엇일까? 그 대답은 1998년 KBS에서 방영한 <몽골리안 루트>라는 프로그램에서 언뜻 엿볼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은 장기간의 기획과 치밀한 사전준비가 돋보이는 다큐멘터리 수작인데, 기획 동기를 이렇게 얘기한다. 한민족의 뿌리라고 알려진 “북방 몽골로이드야 말로 이 지구상에 인류를 확산시킨 주역”임을 밝히고, “한동안 [우리] 무의식 저편으로 밀어두었던 몽골리안의 힘과 정신을 다시 일깨우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한마디로, 우리 민족의 자긍심 고양인 것이다.
다양한 이주설도 학문적 외피를 벗기고 나면 결국에는 민족주의적 정서와 맞닥뜨린다. 최초의 이주민이 유럽인이라는 대서양 이주설은 물론이고, 흑인의 문화가 우세한 브라질에서 발견된 유골이 흑인이며 이들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건너왔다는 태평양 이주설도 결코 민족주의의 틀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은 한갓 해프닝으로 취급하지만, 아르헨티나의 아메히노(Florentino Ameghino)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호모 팜페아누스’(Homo Pampeanus)라는 인종이 자생적으로 발생하였으며, 이는 시기적으로 ‘호모 사피엔스’보다 더 앞선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다. 또한 스튜어트 피델(Stuart Fiedel)과 같은 일부 미국 학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적과 유물에도 불구하고 클로비스 유적이 최고(最古)라고 주장하며 논쟁의 불씨를 지피는 까닭도 자국민의 우월성을 뒷받침해주는 주춧돌을 남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아메리카 이주민에 대한 논란은 기원(origin)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점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20세기 학자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골에서 공통점을 찾았다. 기원은 하나이며, 나머지는 이로부터 파생된 것이라는 위계적 사고에 함몰되어 차이를 무시하고 공통점을 강조함으로써 사고와 논리에 유기적 통일성을 부여하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이제 고고학적 유물은 차이를 말하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이주민은 결코 단일한 루트를 통하여 들어온 단일한 종족이 아니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기원은 하나가 아니며, 수세기에 걸쳐 다양한 사람들이 이루어낸 집합적 총합이라는 것이다. 하나에서 파생된 아메리카가 아니라 다양성에서 출발한 아메리카, 그것이 원래의 아메리카 모습이었다고 증언한다.
[4가지 이주 경로. 자료 출처: Scientific Ameri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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