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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투우와 성모 신앙 ― 스페인 중남미 문화를 읽는 이중코드

[책갈피] 2006. 11. 27. 13:48

 

투우와 성모 신앙스페인 중남미 문화를 읽는 이중코드


김 은 중


1. 序―정치 경제적 삶의 외부로서의 문화


 신대륙 발견 500주년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분석하기 위해서 멕시코 소설가인 까를로스 푸엔떼스(Carlos Fuentes, 1928- )에 의해 씌여진 책 『묻혀진 거울』(El espejo enterrado)을 읽으면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에 놀라게 된다. 영국의 BBC방송과 미국의 스미소니언 재단의 막대한 후원으로 집필된 이 책의 저자가 소설가라는 것, 고대 스페인으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역사를 한권의 책에서 압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것, 책의 내용이 단순히 연대기적 역사 서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페인과 중남미의 문화와 역사를 역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코드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책을 가능하게 한 풍부한 참고도서의 목록 등이 그것이다. 푸엔떼스는 책의 서두에서부터 책 전체의 구조를 이루는 자신의 관점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지속적이고도 풍요로운 문화적 성취를 통해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의 삶을 조명함으로써 대륙 전체에 걸쳐 산적한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위기를 치유할 수 있는 종합적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푸엔떼스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던진다. 문화가 실존적 삶을 위협하는 도전에 대한 응답이라면 “결국 문화의 창조는 정치와 경제를 창조한 바로 그 사람들, 즉 시민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문화는 그 자체 내에서 정치적.경제적 삶과의 일체감을 우리에게 제공하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들은 다가오는 세기에 문화적 통합을 바탕으로 인간 실존의 세 가지 요소인 문화와 정치와 경제를 통합시킬 수 있을까?”1) 이러한 푸엔떼스의 질문은 이 글의 목적과도 상통한다.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며 횡단적인 인간의 삶을 파편화와 위계화를 통해 재단하는 통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먼저 문화를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이먼즈 윌리엄즈(Raymond Williams)가 문화라는 용어는 “영어 단어 중에서 가장 난해한 단어 중의 하나”라고 했던 것처럼 문화라는 개념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2) 문화에 대한 수많은 논의들 중에서 윌리엄즈가 자신의 책 『장구한 혁명』(The Long Revolution)에서 밝히고 있는 문화에 대한 세 가지 정의를 살펴보면, 첫째는 문화란 어떤 보편적인 가치라는 관점에서 인간이 완벽함에 이르는 과정이나 그 상태이며, 두 번째 정의는 기록된 텍스트와 실천 행위로 이루어진 문화이고, 마지막으로는 특정한 삶의 방식으로서의 문화이다.3) 문화에 대한 첫 번째 정의는 ‘이성과 신의 의지가 널리 퍼지도록 하는 것이 문화’라는 매튜 아놀드의 생각과 상통하는 것인데, 이러한 생각은 상당 부분 19세기 이후의 산업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적 비판에서 유래한 것임을 고려한다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우리가 흔히 정신과 문화를 짝짓고(정신문화) 물질이라는 말로 문명을 수식하는 것은(물질문명) 이런 맥락에서 연유한다. 두 번째 정의는 좁게는 문학 작품에 국한되고 넓게는 어떤 질서에 기반해서 이루어진 기호학적 체계 전체를 지칭한다. 세 번째 정의는 인류학적 탐구의 영역과 겹쳐지며 문화가 어떤 의미와 가치의 표현이라고 본다. 따라서 문화 분석 작업이란 드러난 삶의 방식을 통하여 내재된 의미와 가치들을 밝히는 것이다. 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특히 마지막 정의에 주목하는 것이지만, 문화에 대한 세 가지 정의가 서로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관계들 자체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즉 문화란 삶의 방식 전체에 내재한 요소들의 복합적 조직이며 특정한 역사적 집단이나 계급,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들이다.


이렇게 문화의 복합적 조직을 특정한 삶의 방식으로 바라볼 때, 문화는 종종 이데올로기와 혼동된다. 문화라는 개념처럼 이데올로기 역시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특정 집단에 의해 부각되는 현실에 대한 조직적인 사고체계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데올로기가 허위 의식으로 간주되는 것은 현실에 대한 부분적인 사실을 전체적인 것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며, 여기서부터 모든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은 궁극적으로 정치적이라는 명제가 도출된다. 문화나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바라보는 인식틀이라는 점에서만 유사성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함입된다. 이것은 ‘문화와 이데올로기는 어떤 상황에서 만들어지는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문화와 이데올로기가 사회의 경제적 토대에 존재하는 힘의 역학 관계에 대한 상부구조적 반영이라는 것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맑스의 대답이었다.


사회적 생산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필연적인 관계 속으로 편입된다. 그것은 생산력 발전 단계에 대응하는 생산관계이다. 이러한 생산관계들의 종합이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이루고, 그 위에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와 그에 따른 사회의식의 결정적 형태들이 형성된다. 물질 생활의 생산방식이 일반적인 사회적, 정치적, 지적인 생활을 좌우하게 된다. 그러므로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존재가 개인의 의식을 결정짓는다.4)


역사유물론이라는 문제 설정을 통하여 맑스는 근대 철학의 출발점이었던 주체(또는 인간)/진리라는 짝개념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로이 사고할 수 있었다. 맑스의 작업을 통하여 주체는 의식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임을 알 수 있으며, 나아가 인간을 특정한 주체로 만들어 내는 사회역사적 요인을 분석하는 새로운 이론적 틀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맑스가 근대적 사유가 주체/인간이라는 환상적 대상과 단절하고 생산양식이라는 대상을 탐구의 대상으로 정립함으로써 역사과학이란 신대륙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생산양식을 중심으로 파악하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한계를 노출했다. 여기서 우리는 푸엔떼스가 가진 문제 의식이 맑스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사유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푸엔떼스가 말하는 문화는 정치경제적 토대 위에 형성되는 상부구조가 아니다. “맑스로 돌아가자”라는 슬로건 아래 맑스를 극복하고자 한 알튀세르가 주장한 것처럼 상부구조는 토대의 표현이나 수동적 반영이 아니라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다. 알튀세르는 사회구성체(Social Formation) 개념을 통해 이데올로기를 경제적, 정치적 실천과 더불어 주요한 실천의 축으로 설정한다.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허위의식이라는 닫힌 체계에서 벗어나 복합적인 삶의 경험 속의 다양한 모순들을 수용하는 열린 체계로 변화한다.


이데올로기를 통해 사람들은 그들과 그들 존재조건 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그들 존재조건 간의 관계를 실현하는 방식을 표현하며, 이는 실제 관계와 ‘가상의’/‘살아 있는’ 관계 양자 모두를 전제한다. 이데올로기는 사람들과 그들 세계 사이의 관계 즉 자신과 실제 존재조건 사이의 실제적이고 가상적인 관계의 중층적 결정(overdetermination)의 표현이다.5)


알튀세르가 주창한 이데올로기적 실천은 이데올로기에서 출발하여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벗어나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토대와 상부구조의 공식에 따른 기계론적 해석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총체성에 대한 헤겔식 관점도 거부한다.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이데올로기의 외부(外部)를 가지며, 사유의 역사란 이데올로기 내부와 외부의 끊임없는 관계맺음의 역사이고, 이러한 관계맺음은 경제적, 정치적 실천과 더불어 주요한 구체적 실천의 축을 이룬다. 외부란 끝내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은 차이들이 존재하는 곳이며 지배/저항의 단순 대립을 벗어나 모든 개체들에게 생명력을 제공하는 권력의지가 작동하는 곳이다. 주체는 언제나-이미 이데올로기라는 사회적 권력 속에서 인식하며 동시에 이데올로기와 인식론적 단절을 이룸으로써 이데올로기 외부에 존재하는 차이의 유혹을 느낀다. 문화란 이러한 동일성과 차이 사이에서 전개되는 갈등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문화는 ‘생성/되기’이다


푸엔떼스가 지적하고 있듯이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문화적 상황은 심각한 불균형 상태를 보이고 있다. 국가간에 존재하는 차이를 무시하고 말하다면 중남미 국가들은 인플레이션, 실업, 과중한 대외 채무, 빈곤의 증대와 여전히 높은 문맹률, 구매력과 생활 수준의 하락, 정치적 좌절감, 역사적 비전의 상실, 사회 불안으로 위협받는 허약한 민주주의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문화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중남미의 문화는 다양한 역사적 문맥 속에서 형성된 다질(多質)성의 전형이다. 동질(同質)성과 상대되는 말은 이질(異質)성이다. 동질성은 차이를 뛰어넘는 동일성을 강조하고 이질성은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유지되는 차이를 강조한다. 동질성이 이성적 추론의 결과라면 이질성은 현상적 세계의 특성이다. 이질성이라는 말 대신에 다질성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본체와 현상이라는 이원론적 사유를 벗어나 현상 일원론적 세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세계란 잡다한 질(質)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다질성과 상대되는 말은 등질(等質)성이다.


과학의 이상은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질적 다(多)를 과학 법칙의 일(一)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과학적 작업의 밑바탕에는 환원에의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 보니까 현실을 이론에 갖다 맞춰 버리는 일이 빈번히 일어난다. 그래서 클로드 베르나르가 유명한 말을 했다. ”자연에 맞추기 위해 이론을 바꿔야지, 이론에 맞추기 위해 자연을 바꾸지는 말라.“ 이론을 우리가 살고 있는 복잡다단한 이 세계에 더 잘 맞게 고쳐 나가야지, 거꾸로 이론은 세운 다음에 현상들을 억지로 구겨 넣으면 곤란하다.6)


과학적 사유에 대한 이러한 지적은 역사와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마디로 스페인과 중남미 문화는 잡다(雜多)한 문화이다. 동일한 삶의 다른 영역에서 보여주는 중남미의 불균형의 원인에 대한 푸엔떼스의 진단은 번번이 중남미의 문화적 현실과는 동떨어진 정치.경제적 개발 모델을 추구했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했기 때문이라는 점으로 귀결될 수 있다. 따라서 푸엔떼스의 작업은 문화적 현상을 일양(一樣)적으로 해석하는 환원주의를 거부하고 문화적 현상 속에 내재된 포괄적 문맥을 되살려내는 것이다. 문화적 풍요로움(=잡종, hybrid)이란 문화를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풍요로움을 강조하는 말이다. 풍요로움이란 인식과 표현의 다양성을 뜻하는 것으로 인간의 삶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다양성의 장(場)이 바로 문화의 영역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문화의 잡다함에 대한 올바른 이해다. 문화적 잡다성이란 단지 가시적인 복잡성이나 물리적인 복잡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특이성을 내포한다는 뜻이다. 특이성이란 현실의 드러난 부분과 잠재적으로 숨어 있는 부분의 접점을 뜻한다.7) 이런 맥락에서 여기서 말하는 잡다함이란 존재론적 복잡성을 뜻한다. 다시 말해, 스페인과 중남미의 문화가 잡다하다는 것은 단지 다양한 인종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뒤섞여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들의 충돌과 변환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길게 언급한 것처럼 문화는 불변하는 주체/인간의 존재를 반영하는 수동적 거울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를 꿈꾸는 인간의 존재 조건으로서의 욕망을 표현한다. 즉 문화는 존재가 아니라 생성/‘되기’(devenir)이다.


(되기/생성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 사이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되는’ 변화를 주목하고, 그러한 변화의 내재성을 주목하며, 그것을 통해 끊임없이 탈영토화되고 변이하는 삶을 촉발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되기는 자기-동일적인 어떤 상태에서 벗어나 다른 것이 되는 것이고, 어떤 확고한 것에 뿌리박거나 확실한 뿌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즉 근거(Grund)를 찾는 게 아니라 차리리 있던, 아니 있다고 생각하던 근거에서 벗어나 탈영토화되는 것입니다...따라서 ‘되기’의 구도에서 사유하고 산다는 것은 영속성과 항속성, 불변성, 기초, 근본 등과 같은 서양 철학의 중심적 단어들과 처음부터 이별하는 것이고, 반대로 변이와 창조, 새로운 것의 탐색과 실험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입니다.8)


삶의 복잡다단한 현실에서 쉼 없이 스스로의 인간성을 만들어가고 확인해나가는 과정 그 자체를 문화로 본다면, 문화는 명사적 사고로 유형화될 수 없는 것이다. 문화란 구체적 삶의 컨텍스트에서 형성되는 특정한 삶의 방식/텍스트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자기 충족적 폐쇄성을 그 본질로 하는 존재가 아니라 부단히 보다 넓은 삶의 지평 속에 포섭되는 개방성을 그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란 인간의 모든 작위(作爲)가 텍스트로 명사화되는 과정을 삶의 컨텍스트로 피드백시키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문화적 정체성이라고 말할 때 역설적으로 그것은 문화의 가변성을 뜻한다. 문화(文化)가 문화(文禍)가 되는 것은 문화의 속성인 가변성, 즉 생성/되기를 멈출 때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텍스트화된 문화가 컨텍스트에서 너무 멀어져 회귀불능한 상태가 될 때이다. 다가오는 세기에 인간 실존의 세 가지 요소인 문화와 정치와 경제를 통합시키고자 하는 푸엔떼스의 갈망은 사실상, 자본의 체제와 논리를 피할 수 있는 곳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본과 함께 어울려 살면서 자본을 넘어서는 지혜와 결기의 연대”9)를 문화적 통합 속에서 찾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화적 통합이란 인간의 구체적인 실존이 어딘가에 설정해둔 본질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서 이를 무화(無化)시키는 행위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며 즉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곧 부단한 선택이며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3. 투우와 성모 신앙―텍스트에서 컨텍스트로, 컨텍스트에서 텍스트로


푸엔떼스는 『묻혀진 거울』의 1장에서 스페인과 중남미 문화를 형성하는 두 가지 상수(常數)를 언급한다.10) 첫째는 인생의 빛과 어둠의 공존이다. 유럽 대륙이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 등을 통하여 앞다투어 근대로 진입하는 역사적 과정에서 반종교개혁을 표방하며 종교재판소를 통해 극단의 배타성을 보였던 검은 전설(La leyenda negra)의 스페인과 바이런이나 비제가 묘사했던 낭만적이고 현란한 모습의 스페인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스페인 사람들의 예술적 감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주변적인 것, 일그러진 것, 배제된 것을 현실에 통합시킴으로써 드러나지 않는 현실을 드러나게 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특이성으로서 투우와 성모 신앙을 예로 들고 있다.


(1) 투우―속(俗)에서 성(聖)으로


투우는 스페인과 멕시코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화적 현상이다. 투우라는 문화적 코드를 해독할 수 없는 낯선 이방인들의 눈에 투우는 잔인한 스포츠로 보이고, 투우사는 스포츠의 영웅이나 연예계의 스타와 동일시된다. 투우를 바라보는 이러한 시선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비판한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이다. 물론 투우도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의 상품화의 흐름에 편입됨으로써 대중문화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이런 문화적 시각은 일견 옳은 면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오독(誤讀)은 단지 이질적 현상에 대한 낯설음에서 기인하기보다는 우리가 보고 있는 텍스트를 탄생시킨 역사적 컨텍스트가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근대를 거쳐 탈근대를 논하는 시점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성(聖)과 속(俗)을 아우르는 문화적 현상을 제대로 읽어내기는 쉽지 않는 일이다.


황소는 살아 있는 자연의 상징이다. 황소는 때로는 자연의 풍요로움과 다산(多産)성을 상징하기도 하고,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때로는 잔인한 폭력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두 개의 모습이며, 인간이 자연에게 느기는 이중적 의미의 체계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스페인의 황소 숭배 문화를 지중해 연안 문화권으로 확대하면 황소는 인간과 한몸을 이루는 존재로 간주된다.11) 그리스 신화에서 테세우스라는 영웅의 칼 앞에 쓰러지는 괴물인 미노타우로스는, 푸엔떼스의 해석에 따르면, 황소의 힘과 다산성에 인간의 지성과 상상력이 결합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과 인간, 야수성과 문화성이 만나는 경계, 그 경계에서 성립되는 아슬아슬한 조화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투우는 투우사와 황소 사이에 벌어지는 목숨을 건 투쟁이 아니라 “미노스의 미로에서처럼 인간과 황소가 하나가 되는 신화적 순간이 다시 한번 재현되는”12) 의식이다. 미노타우로스에 대한 그리스 신화적 해석은 지극히 인본주의적이며 미노타우로스의 야수성은 인간이 자연에서 멀어진 거리를 뜻한다. 그러나 문학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야수문학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인간중심적 해석은 흔히 전도되어 나타난다. 중남미 작가의 경우만 보더라도, 훌리오 꼬르따사르의 해석에 따르면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미로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그에게 실을 준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와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라 미노타우로스가 테세우스를 죽이고 미로에서 빠져나오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보르헤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영지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조물주의 차원으로 승격시킨다. 그의 작품 「아스테리온의 집」에 등장하는 미노타우로스가 테세우스의 칼에 죽는 것은 고독에서 탈출하려는 의도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13) 투우에 대한 푸엔떼스의 설명도 꼬르따사르와 보르헤스처럼 인간중심적 해석에서 벗어나 있지만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양극단에서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되기’를 보여준다. 황소(동물)-되기 혹은 투우를 통한 자연-되기.


여기서 ‘되기/생성’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다. 앞의 인용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되기는 자기-동일적인 어떤 상태에서 벗어나 다른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황소-되기는 투우사가 황소의 모양이나 행동을 흉내내거나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황소와 투우사가 서로 촉발.변용되면서 새로운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되기는 통상적인 이항(二項)적 대립에 빠져드는 게 아니라 이항적 선분을 깨고 이항적으로 만들어지는 대립을 분해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항은 인간이 특권적인 존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인간학적 태도의 항과 인간과 대립되는 자연을 찬미하고, 문명.사회나 기계와 자연을 대립시키는 루소적 의미의 자연주의의 항이다. 그렇다면 이항적 선분을 깨고 이항적 대립을 분해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이중의 탈영토화 운동”을 뜻한다.14) 다시 말해, 인간인 투우사도 변용되고 자연인 황소도 변용되어 새로운 요소,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가 새롭게 창조되는 것일까? 그것은 죽음으로 완성되는 희생(sacrificio)이다.15) 승리와 정복이 아니라 죽음이며 희생이고, 희생을 통한 구원이다. 마치 보르헤스의 미노타우로스처럼. 이런 문화적 코드를 가지고 보면 투우는 의식이며 제의이고, 투우사는 인간과 자연의 경계에 놓여 있는 비극적 주인공이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이 운명과 자유의지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라면 투우사는 인간 생존의 조건인 자연과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서 굴복시켜야 하는 자연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이다. 투우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청교도적 위선의 탈을 벗어버리고 자연에서 탄생한 인간의 기원과 자연의 희생 위에 생존을 유지해온 역사적 기억들을 종교적 의식과 예술로 변형시킨 것이며, 더 나아가 구원의 의식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이 때문에 푸엔떼스는 투우를 매주 마다 행해지는 이단적 성향의 기독교적 미사라고 정의한다.


이 두 의식은 희생이라는 공통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행해지는 시간은 다르다. 하루 중 미사는 아침에 행해지고 투우는 저녁 무렵에 행해진다. 미사는 중천에서 빛나는 태양 밑에서 이루어지는 투우이고, 투우는 이제 곧 어둠이 찾아올 석양에 행해지는 빛과 그림자의 미사이다.16)


기독교의 미사와 투우를 동일시하는 푸엔떼스의 과감한 발언은 희생제의라는 맥락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미사가 세상이 온통 빛으로 가득한 시간에 행해지는 것은 어둠을 정복한 빛의 승리이며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신의 은총을 뜻하는 것이라면, 투우는 빛과 그림자, 삶과 죽음 속에서 행해지는 미사이다. 투우장에 모이는 사람들은 민중이며 민중들은 투우장에서 자기 자신과 만난다. 투우사 역시 민중을 대변한다. “투우사는 마을의 왕자, 다시 말해 죽음의 위험에 노출된 황소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해진 왕자이다. 투우는 늘 인간의 주변에 머물러 있는 죽음과 마주하는 것이며 일련의 엄격한 규칙을 따른다... 간단히 말해서 투우는 망토를 이용한 기술로 황소가 본능을 발휘하지 않도록 한 뒤에 황소를 제어하는 것이다. 망토와 발과 몸의 동작을 통해서 투우사는 황소를 움직이게 한 뒤, 투우사가 정한 결투지점으로 황소를 유인한다. 이제 황소와 투우사는 함께 움직이고 이윽고 완벽한 빠세(pase)―가능한한 황소와 가까운 거리를 유지한 채 몸을 순간적으로 돌려 황소의 공격을 피하는 것―자세를 취한다. 하나의 조각상과도 같은 경이로운 순간, 황소와 투우사는 맨몸으로 만나 서로 힘과 아름다움, 그리고 위험을 동반하는 부동의 이미지와 동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보여준다.”17)


투우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투우가 에로틱한 이벤트를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한 남성이 저렇게도 도발적인 성적 포즈를 취할 수 있는 장소가 투우장 말고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번쩍이는 의상으로 보란 듯이 사람의 눈길을 끄는 저 뻔뻔스러움, 하반신을 꽉죄는 바지, 뒤로 쭉 뺀 궁둥이, 옷 속에 조여져 있는 남성의 심볼, 어떻게든 보는 사람을 유혹하고자 하는 저 나르시스적인 발의 움직임, 피와 흥분에의 갈망, 투우는 이런 터무니없는 오만과 성적 노출을 용인한다.”18) 앞서 언급한 것처럼 푸엔떼스가 투우와 기독교적 미사의 동일화를 통해 세속적 투우를 종교적 신성으로 끌어올리는 한편, 성스러운 기독교적 미사를 세속으로 끌어내렸다면, 이때 세속의 성(性)과 종교의 초월적 성(聖)은 에로티시즘에서 합류한다. 투우와 기독교 미사의 에로스-되기.


(2) 성모 신앙―성(聖)에서 속(俗)으로


왕국의 통일된 이념으로 기독교를 선포하고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임을 자처했던 스페인의 정신 세계를 언급하면서 푸엔떼스는 어머니 신앙을 부각한다. 기독교 교리에 의한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대신에 대지모(大地母) 신앙을 부각시키는 것 역시 탈영토화의 시도로 볼 수 있다. 여기서도 푸엔떼스는 두 개의 어머니 상― 인간의 탄생과 죽음을 주재하는 ‘바사의 귀부인’ 상과 성적으로 문란한 처녀이자 관능적인 정부(情婦)를 상징하는 ‘엘체의 귀부인’ 상―을 병치시킨다. 이것은 기독교 미사의 에로스-되기의 극단적 예이다.


무시무시한 요부(妖婦)인 엘체의 귀부인은 그녀의 사시(斜視) 눈과 이방인의 치장으로 고대 그리스적 순결성을 무너뜨림으로써 지구상의 모든 여신은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하고, 어머니이면서 애인이고, 처녀이면서 요부라는 두 얼굴을 가진 신비스런 존재라는 기본적인 진실을 다시 생각해보게끔 한다. 모든 여신들은 아스텍 신전의 무시무시하고 불가사의한 여신들처럼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순결하지 못한 상이다.19)


푸엔떼스가 기독교의 창조주인 성부(아버지)의 자리에 성모(어머니)를 놓은 것은 기독교 교리를 탈영토화시키려는 의도이다. 구약의 계율이 영토화의 전형이라면, 이러한 규율 대신에 사랑을 선포한 신약의 교리는 탈영토화의 전형이다. 그러나 희생을 통하여 사랑을 선포한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삶의 터전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초월성을 획득하게 된다. 초기 기독교의 신자들이 자신들이 죽기 전에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었던 예수의 재림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전의 권위는 신성화된 초월성과 폭력에 의지한다. “초월자는 모든 폭력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소름끼치는 존재지만, 반면 그것을 떠맡음으로써 안정과 균형을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경외스러운 존재가 된다.”20) 종교와 정치가 저지르는 폭력의 위험성은 자신들의 텍스트에 신적 후광을 덧씌운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은 역사가 일러주는 준엄한 교훈이다. 이런 맥락에서 푸엔떼스가 성모 신앙을 스페인과 중남미의 종교적 특징으로 언급하는 것은 아버지의 ‘어머니-되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되기는 ‘이중의 탈영토화 운동’이다. 즉 어머니가 아버지의 권위와 폭력을 그대로 계승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어머니-되기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한 어머니-되기는 성모의 에로스-되기로 가능하다. 성모의 에로스-되기는 희생의 성스러움을 세속화시키는 작업이 아니라 초월성에서 비롯되는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푸엔떼스가 대지모 여신 상이 갖는 이중적 이미지를 순결과 처녀 수태로 상징되는 기독교의 성모 마리아 신앙과 극적으로 대비시키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엘체의 귀부인 상이 보여주는 에로틱한 모습은 투우와 동일하게 기독교의 순결성에 대해 이단적 성향을 강조하고 있으며, 축제의 형태로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스페인의 성모 마리아 숭배는 이러한 이단성을 계승하고 있다. 부활절에 세비야에서 진행되는 축제는 그리스도와 성모를 찬양하며 속죄를 구하는 종교적 행사지만, 이 축제의 주인공은 성모 마리아이다. 도시의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그들의 수호성인으로서 자신들이 만든 성모 마리아 상을 들고 행진하는데 도시를 가득 채운 군중들이 외치는 성모 예찬의 외침은 남성들이 아름다운 여인에게 던지는 추파(guapa, guapa)와 다르지 않다. 철학자 오르떼가 이 가세트가 이 축제를 일컬어 “현란한 색(色)의 향연”(fiesta multicolor)이라고 불렀던 연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스페인의 이러한 성모 신앙은 중남미로 그대로 옮겨져 과달루뻬 성모 신앙으로 발현된다고 볼 수 있다. 식민 초기 중남미 사회를 구성하던 계급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역사적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할 때 과달루뻬 성모는 그들에게 정치적 통합이나 종교적 통합이 아닌 문화적 통합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메소아메리카인들의 대지모(大地母)인 또난친(Tonantzin)을 모셨던 떼뻬약(Tepeyac) 동산에서 가무잡잡한 얼굴로 발현한 과달루뻬 성모는 모든 사람의 마음과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과달루뻬 성모는 정복당한 원주민들, 정복자인 스페인 사람들의 후손(끄리오요criollo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스페인 본토인들과 구별되었던)들, 스페인 사람과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후손(메스티소, mestizo)들 모두들 자신의 품 속에 끌어안았다. 이것은 성모의 모든 것-되기 혹은 절대적 탈영토화라 할 수 있다. 절대적 탈영토화란 어떤 문턱도 넘어설 수 있는, 그래서 되고자 하는 어떤 것이 될 수 있는 순수잠재성이다.21)



4. 結―문화의 토대로서의 에로티시즘


문화는 자연에서 솟아오른 인간 왕국의 가장 포괄적 구조이며 질서이다. 그러나 구조의 바깥에는 문화적 질서(cosmos)를 떠받치는 외부, 거대한 혼돈(caos)이 자리잡고 있다. 카오스는 문화적 질서와 대립되는 무질서가 아니다. 구조와 구조 바깥의 관계를 질서와 더 큰 질서(=신)로 보느냐, 아니면 코스모스와 카오스로 보느냐는 관점에 따라 문화적 양상은 크게 달라진다. 그러나 카오스가 무질서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문화적 질서에 환원되지 않는 카오스는 더 큰 질서와 동일하게 생각될 수 있다. 너무 많아서 복잡하게 보이는 질서는 편협한 질서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에 무질서하게 보일 뿐이다. 문화적 구조를 벗어나 더 큰 질서와 소통하는 방법은 문화의 잡다함을 인정하고 인식을 확장함으로써 다양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에로티시즘은 질서를 벗어나 카오스로 다가가는 욕망이며, 더 큰 질서로부터 비롯되는 유혹이다. “존재는 에로티시즘이다”는 옥따비오 빠스의 선언은 “인간이 시간성이며 변화이고 타자성이 그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구성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22) 에로티시즘은 욕망의 끌림이며 욕망의 생산적 표현이다.23) 욕망의 생산적 표현은 앞에서 줄곧 이야기한 ‘되기’이다. 황소(동물)-되기, 여성-되기, 아이-되기, 어머니-되기, 에로스-되기, 모든 것-되기.


푸엔떼스는 신대륙 발견 500주년을 역사적으로 자리매김하는 작업에서 서구 근대성(Modernidad)을 반성하고 문화로 보는 새로운 역사적 관점을 제시한다. 그의 작업은 삶-구원이라는 도식에서 벗어나 삶-죽음이라는 도식으로 세속적 삶을 조명하는 작업으로 시작하여 에로틱한 욕망을 통하여 정체성에서 타자성으로 열려가는 문화의 다양성을 인간에게 주어진 진정한 구원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귀결된다.24) 열린다는 것은 타자와 함께-있음의 관계로 들어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그것은 문화적 통합의 장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타자-되기. 인간 삶의 양극단인 성(聖)과 속(俗)도 되기의 양극단일 뿐이다.

---------------------------------------------------------------------1) 카를로스 푸엔테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서울, 까치, 1997, p. 388.


2) Raymond Williams, Keyworks, London, Fontana, 1983, p. 87.


3) Raymond Williams, The Long Revolution, Hanrmondsworth, Penguin, 1965, P. 57이하 참조.


4) Karl Marx,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Peking, Foreign Language Press, 1976, p. 3. 존 스토리,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서울, 현실문화연구, 1994, p. 15에서 재인용.


5) Louis Althusser, For Marx, London, Allen Lane, 1969, p. 113. 존 스토리,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p. 163에서 재인용


6) 이정우, 『접힘과 펼쳐짐』, 서울, 거름, 2000, p. 163.


7) "물은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도 있고, 얼음의 상태로 또는 수증기의 상태로 존재할 수도 있다. 그래서 물은 두 개의 특이성을 내포한다. 즉 기체에서 액체로(또는 그 반대로) 되는 특이성과 액체에서 고체로(또는 그 반대로) 되는 특이성이다. 현재 물이 어떤 상태건, 또는 어떤 변화를 겪고 있건 물은 두 개의 특이점을 가진다. 물이 액체에서 고체로 변할 때, 이 두 특이점 중의 하나가 현실화되는 것이다. 사건은 현실화된 특이성이고, 특이성은 잠재적 사건이다.“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서울, 한길사, 1999, p. 121.


8) 이진경, 『노마디즘2』, 서울, 휴머니스트, 2002, pp. 33-34. 영토화와 탈영토화를 간단히 풀이하면 영토화란 어딘가에 끌어들이거나 귀속시키는 것이고, 탈영토화란 귀속되거나 머물렀던 영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9) 김영민, 『문화(文化) 문화(文化) 문화(紋和)』, 서울, 동녘, 서울, 1998, p. 153.


10) 여기서 상수란 불변의 요소라기보다는 기본적인 틀을 유지하면서 변화를 가능케하는 패턴이라고 할 수 있다. “패턴은 컨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에 생긴 ‘긴장의 형태’다. 이 긴장의 사실은 텍스트의 유아독존을 반증한다. 텍스트 속으로 컨텍스트가 침윤해 들어오고, 넗어지고 깊어진 텍스트는 스스로의 신진대사와 배설 작용을 통해서 역으로 컨텍스트를 풍성하게 만드는 피드백 작용, 이것은 이러한 긴장의 조율에 다름아니다.” 김영민, 『컨텍스트로, 패턴으로』, 서울, 문학과사상사, 1996, p. 78.


11) 고대 중국의 전설에 등장하는 신농(神農)이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가진 존재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사유의 보편성에 대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 신농은 쟁기를 만들고 땅을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12) 푸엔테스, 앞의 책, pp. 25-26.


13) 「아스테리온의 집」은 보르헤스 전집3 『알렙』(민음사, 1996, pp. 94-99)에 실려 있다. 작품의 결말은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말로 끝나고 있다. “아침 태양이 청동 칼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칼에는 이미 피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정말 믿을 수가 있겠어, 아리아드네?」 테세우스가 말했다. 「미노타우로스는 전혀 자신을 방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


14) 이진경, 앞의 책, P. 99.


15) 이해를 돕기 위해 되기의 예로 서양 음악에서 여성-되기, 아이-되기를 들 수 있다. 남성중심주의적인 교회에서 남성으로 이루어진 성가대가 여성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이 사용하는데 한가지는 카운터 테너(counter tenor)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가성(假聲)을 사용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카스트라토(castrato)이다. 카스트라토는 사춘기 이전의 소년을 거세하여 소프라노 음역을 노래하게 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카스트라토는 남성이 여성이나 아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여성, 아이가 모두 변하여 음향적 성분이 되는 것이다. 이진경, 앞의 책, pp. 94-100 참조.


16) 푸엔테스, 앞의 책, p. 23.


17) Ibid., pp. 24-25.


18) Ibid., pp. 23-24.


19) Ibid., p. 30


20) 아사다 아키라,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구조에서 힘으로』, 서울, 새길, 1995, p. 42.


21) 이진경, 앞의 책, p. 181 이하 참조.


22)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서울, 솔, 1998, pp. 236-237.


23) 여기서 언급한 ‘표현’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염두에 둔 것이다. 스피노자는 존재를 실체(substantia)와 양태(modus)라는 개념으로 요약했는데, 그가 말하는 실체는 자연 밖에서 자연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자연 안에 있는, 모든 변화의 원인을 가리킨다. 즉 실체는 자연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실체는 양태로 표현된다”과 말했는데, 여기서 표현은 ‘존재한다’의 뜻이다. 그래서 “실체는 양태로서 존재한다”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자연 안의 생산적 힘이 실체이며, 자연은 이 생산적인 힘으로 가득 차 있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표현’하는 것이다.


24) 달리 말한다면, 인간 사회에 일양적으로 적용되는 단계적 혹은 직선적 모순발전 도식으로부터 다양한 문화유형론을 되살려내야 한다는 것이며, 모든 문화유형론은 보편인식론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근대적 역사주의가 되찾아 준 문화의 다원성은 우리 시대의 다원성이라는 하나의 합으로 귀결된다. 현대의 위기는 서로 다른 두 문명 사이의 투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류 문명 내부의 균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