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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피부[(La)pell freda] 본문

스페인·라틴문학

차가운 피부[(La)pell freda]

[책갈피] 2007. 10. 15. 17:41

 

차가운 피부



세상 끝의 한 섬에서 남자 둘과 미지의 생명체가 생존을 위해 투쟁을 벌인다. 이들의 투쟁은 인간과 비인간에 대한 고찰로 전이되며 기묘한 매력으로 눈을 사로잡는다.  바르셀로나 출신 작가인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의 『차가운 피부』는 외딴 섬을 배경으로 인간의 고독과 폭력성, 그리고 원초적 감정인 두려움, 미움, 사랑을 능숙하게 그려내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20년대. 한때 아일랜드 독립 운동가였던 ‘나’는 독립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폭력에 환멸을 느끼고 남극의 외딴섬―해양지도에도 잘 나타나지 않는―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나는 일 년 동안 기상관으로 근무하며 책이나 읽을 심산이다.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섬. 그런데 임무 교대해야 할 전임 기상관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유일한 이웃인 등대지기― ‘바티스 카포’라는 이름을 가진―는 나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다.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찾아온 섬에서의 첫날 밤.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진다. 미지의 괴물들이 나타나 내 숙소로 정해진 기상관 사택을 습격하고, 나는 괴물들에 맞서 싸우며 살기 위해 발버둥친다.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책도 땔감으로 삼았다. 종이는 불길이 오래 가진 않지만 아주 잘 탄다. 폭약의 효과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샤토브리앙이여 안녕!  괴테여 안녕!  아리스토텔레스, 릴케, 스티븐슨이여 안녕!  마르크스, 라포르그, 생시몽이여 안녕!  밀턴, 볼테르, 루소, 공고라, 그리고 세르반테스여 안녕! 존경 받는 내 소중한 친구들이지만 예술이 필요보다 앞설 수는 없다. 아무리 그래야 당신들은 말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 드라마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장작더미와 책을 쌓아 올리고, 석유를 끼얹고, 나중에 쓸 땔감으로 책들을 모아 묶음을 만들면서 나는 한 사람의 고독한 삶, 그러니까 내 생명이 모든 인류의 천재, 철학자, 문인들의 작품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괴물은 양서류의 얼굴에 구멍만 뚫린 코, 입술이 없는 입을 가진, 유인원과 흡사하고 몸가짐은 사람 같다. 악몽 같은 밤이 지나고 괴물들이 사라지자 나는 생존하기 위해 방어책을 세운다.  그때 찾아온 등대지기 ‘바티스 카포’.  그는 괴물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섬을 떠나지 않았고, 나에게 사실을 말해주지도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카포’는 전임 기상관이었다)  카포는 잔 일을 시키는 노예를 하나 데리고 있는데 이는 놀랍게도 밤마다 우리를 공격하는 괴물과 같은 종으로 여자의 몸을 가진 ‘마스코트’.

생존을 위하여 기상관 숙소를 버리고 등대지기와 합류한 나는, 카포와 함께 밤마다 공격해 오는 괴물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다. 총과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한 두 사람은 괴물 소탕작전에 돌입한다.  벌떼 처럼 몰려오는 괴물은 두 사람에겐 단지 자신이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몰려오는 괴물. 그들에게 이길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 ‘나’는 그 섬의 괴물들에게는 자신이 침입자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나’ 자신이 아일랜드 독립전쟁에 참가한 것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은 ‘전투에서 패할 때마다 매번 더 열심히 다음 패배를 준비한 나’와 전혀 다르지 않다.


“눈이라는 것은 보는 것이지만 관찰하는 눈은 드물고, 보고 깨닫는 눈은 더더욱 드물다. 어느 날 밤 나는 내리는 눈을 맞으며 발코니에 있었다. 전에는 대리석 산이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그때는 수평선의 모래 한 알까지도 낱낱이 다 보였다. 얼마 전 괴물들이 우리의 방어 능력을 시험하며 공격해왔을 때, 카포가 작은 괴물 한 마리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러자 그 괴물을 도우려고 다른 네 마리가 달려왔다. 오! 맙소사, 맙소사. 형제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적의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그들의 가상한 노력을 전에는 식인종의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특히 몸뚱이가 죽기도 전에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그들의 잔인함을 증오했다. 우리는 그저 형제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그들을 향해 얼마나 수없이 총을 쏘아댔던가?”


결국 나와 등대지기인 카포는 존재를 위해 서로를 인정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고 섬의 생물체들과 생존의 대치를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 방법을 찾고자 했던 나와 자기만의 방식을 고집하던 카포 사이에 골은 깊어가게 된다. 결국 카포는 자살을 하게 되고 카포의 모습으로 변해간 나만이 섬에 남는다.

(이래서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소설의 첫 부분과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상황으로 되돌아간다.  만약 내 후임 기상관이 온다면 이 소설의 내용을 처음부터 다시 반복할 것 같다. 각자의 역할만이 바뀌면서……)


작가는 소설 ‘차가운 피부’를 통해 폭력이 어떻게 시작되고 또 어떻게 화해에 이를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의 두 사람은  ‘마스코트’를 통해 욕망을 해소하기도 한다.  ‘나’는 마스코트의 차가운 몸이 가져다주는 쾌감을 잊지 못하고, 카포의 눈을 피해 마스코트와 사통을 한다. 작가는 나, 카포, 마스코트의 일그러진 삼각관계를 통해 소설의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 욕망과 일그러진 인간관계를 그려 보이고 있다.

 

 

 

 

“인간은 얼마나 고독을 즐길 수 있으며 얼마나 혼자만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나도 바티스도 어쩌면 너무도 오랫 시간 혼자 살아왔기에 소통의 방식을 잊었는지 모른다.  나는 고아라는 틀 속에서 세상과 어울리지 못했고 바티스 역시 나 아닌  다른 이와의 교류를 기억해내지 못했을 수 있다.  그 둘 사이에 암놈의 생물체가 연결되어 있었다. 외로움의 끝을 넘어선 욕망이라는 이름을 이기지 못한 바티스도 결국은 사랑을 원했고 그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던 나에게도 암놈은 점점 그녀로 인식되고 결국은 ‘아네리스’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게 된다. 무언가에게 나만의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소설이 작가의 삶과 경험을 바탕으로 이뤄지듯이 『차가운 피부』의 작가 <피뇰> 또한 소설 속 ‘나’의 조국인 아일랜드처럼,  ‘나’처럼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였던 카탈루냐의 바르셀로나 출신이다. 『차가운 피부』는 프랑코 정권에서 공식으로 사용이 금지된 카탈루냐어로 쓰여졌다.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Albert Sanchez Pinol)]


1965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문화인류학자이자 작가이다. 아프리카의 독재자들을 그린 풍자 수필 『어릿광대와 괴물 Pallassos I monstres』(2000)로 호평을 받았다.

뛰어난 화술과 독창성이 돋보이는 그의 첫 소설 『차가운 피부』(2002)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서만  131주 동안 베스트셀러에 올라 20만 부 이상 팔리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 성공에 힘입어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차가운 피부』로 2003년에 오호 비평상el Premio Ojo Critico 문학 부문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