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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론·News

미니픽션: 21세기 문학의 새로운 지평

 

미니픽션: 21세기 문학의 새로운 지평


송 병 선


     199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는 스페인의 작가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세상을 보는 지혜』가 출판계를 휩쓸면서 아포리즘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90년대 중반에는 엽편소설이라는 국적 불명의 이름이 위세를 떨치면서 새로운 문학 장르로 자리잡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아포리즘은 독자에게 즉각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고, 따라서 암시적이고 은유적인 방법을 통해 독자들을 다양한 사고의 세계로 이끌기보다는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는 처세에 치중함으로써 문학으로 간주되지도 못한 채 거의 그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 또한 엽편소설도 모든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종래의 ‘콩트’와 아무런 변별력을 가지지 못하면서 서서히 우리의 뇌리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부각된 것을 두고, 단순히 짧고 간단한 것만을 좋아하는 현대인의 속성과 그런 장르에 내재하는 일회성 때문이라고 단정짓기에는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듯 하다. 그것은 세계문학의 보고(寶庫)라고 일컬어지는 라틴아메리카 현대 문학이 1950년대부터 ‘짧은 작품’에 관심을 기울였고, 실제로 그런 것이 20세기 후반에 와서 본격적인 문학 장르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니픽션’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런 글쓰기는 우리의 아포리즘 문학이나 엽편소설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 글은 현재 라틴아메리카를 위시한 세계 문학계를 휩쓸고 있는 미니 픽션의 본질과 특성을 알아보고, 왜 그것이 21세기 문학을 예언하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1. 어떤 작품을 ‘미니픽션’이라고 하는가


     앞에서 말했듯이 20세기 후반에 들면서 라틴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초단편 소설이 갈수록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짧은 이야기들을 체계화시켜 설명하는데는 많은 문제점이 따른다. 그것은 단지 미니픽션이 정확히 무엇이며, 그것을 하나의 문학 장르로 간주해야 할지, 아니면 단지 하나의 서술 형식으로 간주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문제를 시작으로, 수없이 많고 다양한 미니픽션들의 공통적인 특징과 경향이 무엇인지도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문제는 ‘미니픽션’이 단편 소설과 유사한지, 아니면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밝혀야 한다. 즉, 장르의 문제 (단편소설인가?), 미학적 문제 (문학작품인가?), 분량의 문제 (미니픽션이란 얼마나 짧은 것을 일컫는가?), 용어의 문제 (어떻게 부를 것인가?), 유형의 문제 (얼마나 많은 짧은 단편의 종류가 있는가?), 텍스트 속성의 문제 (왜 그토록 짧은 것인가?)가 대두된다. 우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짧은 단편소설의 종류가 몇 가지로 분류되고 있는 지부터 알아보는 것이 급선무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다른 의문을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와 비평가들은 전통적인 단편의 분량이 2000단어에서 3000단어사이라는데 대체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그러니까 원고지로 환산하면 대략 70매에서 150매 사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단편소설보다 짧은 분량의 미니픽션은 2000단어 미만, 즉 원고지 70매 미만의 작품을 일컫는 용어로 이해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런 단편소설보다 짧은 작품은 분량에 따라 대략 짧은 단편, 아주 짧은 단편, 그리고 초단편으로 분류되는데, 일상적으로 ‘미니픽션’이라 함은 아주 짧은 단편과 초단편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1) 짧은 단편: 원고지 20매에서 70매 사이


     이런 종류의 단편은 ‘서든 픽션(sudden fiction)’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선집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이것은 마이크로코스모스 (SF의 경우)라고 불리기도 하고, 쇼트쇼트라는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단편을 수집하고 연구한 어빙 하우(Irving Howe)는 “짧으면서도 명작인 작품들 속에서는 상황이 인물을 대치하고, 운명이 개인성보다 중요하며, 극단적 상황이 보편적인 것의 상징으로 사용된다.”라고 지적한다.


     이런 의견을 바탕으로 하우는 짧은 단편들을 분류한다. 짧은 단편은 하나의 사건을 서술할 수도 있고, 한 사람의 인생을 축약할 수도 있으며, 아니면 서정적 어조나 우화적 어조를 채택할 수도 있다. 이런 짧은 작품들의 특성은 대략 4가지로 요약된다.


    (1) 갑작스런 사건을 다루는데, 이런 경우 작중 인물의 삶 속에서 극단적으로 짧은 기간동안 일어난 깨달음이 이런 사건을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깨달음은 대부분 구체적인 상황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가 각자의 상황에 따라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작품으로는 옥타비오 파스의 「푸른 나뭇가지」나 아우구스토 몬테로소의 「일식」 등을 들 수 있다.


    (2) 작중인물의 일생을 하나의 이미지로 축약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셔우드 앤더슨의 「페이퍼 필즈」(Paper Pills)나 「말하지 않은 거짓말」(The Untold Lie)을 비롯하여 『와인즈버그, 오하이오』에서 쓴 일련을 짧은 소설들이 이에 해당한다.


    (3) 아무런 깨달음이 없는 순간적인 이미지나 내면 독백, 혹은 기억의 흐름만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세 몽유병자의 고통」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종류의 짧은 작품을 연구하면서, 찰스 박스터(Charles Baxter)는 소설 속에서는 도덕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성숙시키는 길고 복잡한 과정을 볼 수 있는 반면에, 전통적인 단편에서는 결정의 순간을 엿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도덕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순간에 참여한다. 반면에 짧은 단편에서는 갑작스런 긴장 상태에 직면한 한 인물이나 공동체의 반응을 지켜볼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결정을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런 가능성은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의식으로 대치된다.


     이런 짧은 단편으로는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의 『여성 혐오에 관한 작은 이야기들』(Little Tales of Misogyny)이나 우루과이 작가인 마리오 베네데티의 짧은 단편들이나 올리베리오 히론도,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의 작품들을 들 수 있다. 이것들 이외에도 멕시코 작가인 후안 비요로의 『흘러간 세월』(1986)과 아구스틴 몬스레알의 『심연의 장소들』(1993)도 이 범주에 속한다.


2) 아주 짧은 단편들: 원고지 3매에서 20매까지


     여기에 속하는 작품들은 흔히 ‘플래쉬 픽션’(Flash Fiction)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것은 여자들에 의해 급히 쓰여진 순간적이고 작은 이야기들과 관련이 있다. 이레네 자하바는 아주 짧은 단편들에 관해 “그것들은 누군가가 급히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공중전화에서 기본 통화 시간내에 말할 수 있는 이야기이거나 머나먼 곳에서 엽서를 쓸 때 적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라고 정의 내린다.


     흔히 아주 짧은 이야기들의 제목은 수수께끼와 같다. 그리고 그 속에는 주제와 형식의 애매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끝도 역시 수수께끼 같거나 갑작스럽게 끝이 난다. 그것은 이 이야기들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독자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독서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아주 짧은 이야기에는 프란츠 카프카의 『야수집』(1924)에 수록된 「세이렌들의 침묵」이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환상 동물학 안내서』(1957),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기인과 속물 이야기』(1963) 등이 있다. 또한 옥타비오 파스의 『독수리 혹은 태양?』(1949) 페데리코 아라나의 『절대적인 라틴아메리카의 백과사전』(1977), 산드라 시스네로스의 『망고 거리』(1994)가 있다.


3) 초단편: 원고지 1매에서 3매까지


     종종 ‘마이크로픽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런 텍스트들은 문학 작품 중에서 가장 복잡한 분야 중의 하나이다. 이런 초단편의 부류로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선정한 『짧고 특이한 이야기들』(1953)과 에드문도 발라데스의 『상상의 책』(1976)이 대표적이다. 또한 이런 범주에는 환 아르만도 에플레(Juan Armando Epple)가 선집한 작품도 포함된다.


     이런 마이크로 픽션의 종류는 서술이라기 보다는 에피그람에 가까운 성향을 띤다. 독일 비평가 뢰디거 임호프(Rüdger Imhof)는 이런 작품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편이라는 장르에 관한 관심을 버리고, 보다 중요한 문제, 즉 이런 텍스트들의 분량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초단편의 예술성과 그 미학은 주로 두 가지에 의존한다. 첫째는 의미의 애매성이며, 둘째는 문학적 혹은 문학 외적 상호텍스트성에 있다. 이런 것들은 바로 초단편이 포스트모던적 성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인용된 텍스트를 패러디할 경우, 우리는 포스트모던적 상호텍스트와 만나게 된다. 즉, 역사의 회복이라는 측면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의 결과는 무엇일까? 미니픽션 속에서 깨달음의 존재는 거의 텍스트적 (혹은 상호텍스트적)이며, 그것은 바로 구조적 특성에서 탄생된다. 왜냐하면 이런 깨달음은 특정 인물이나 특정한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이런 미니픽션 속에서는 인물이란 개념이 상호텍스트성이나 의미의 애매성의 무게에 짓눌려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하이퍼텍스트의 경우처럼, 의미를 구성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독자가 처한 여러 복합된 상황에 의해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런 미니픽션에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의 의미는 불안정하다. 즉, 서술자의 목소리가 의도한 대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서술의 의도가 비결정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즉, 안정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없는 상황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미니픽션에 속하는 것으로는 레이몬 크노의 『문체 연습』(1947), 수피즘의 역설적인 비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만드는 사람』(1960)에 수록된 「박물관」 편을 비롯해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떠도는 말들』과 『포옹의 책』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후안 호세 아레올라의 『여러가지 고안』(1955) 『장터』(1962)와 훌리오 토리의 『총살과 다른 작품들』(1964), 세르히오 골바르스의 『모범적인 거짓말』 (1969), 레네 아빌레스 파빌라의 『회전목마 속의 환상』(1978) 『잃어버린 직업』(1983), 아우구스토 몬테로소의 『검은 양과 다른 작품들』(1969), 기예르모 삼페리오의 『상상의 노트』(1990), 에델 크라우세의 『번개』(1995) 등도 여기에 속한다.


     이중에서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독특한 작품은 세르히오 골바르스의 『모범적인 거짓말』이다. 이 작품은 거짓말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면서 원고지 8매 가량의 아주 짧은 단편으로 시작하지만, 그 이후 수록된 42개의 작품은 갈수록 앞의 작품들보다 짧아진다. 그러면서 마지막 작품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짧을지도 모르는 단편으로 끝을 맺는다. 이 작품 제목은 ‘신(神)’인데, 이 초단편 텍스트는 단지 ‘신’이라고만 쓴다. 이렇게 짧지만, 이 작품은 매우 의미 심장하게 다가올 수 있다. 특히 멕시코처럼 가톨릭이 대부분이 나라에서는 말이다.


     이렇게 단 하나의 단어로만 구성된 텍스트지만, 이 작품의 의미는 엄청나게 확장될 수 있다. 이것은 각각의 독자가 지닌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상호텍스트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한 단어에서 우리는 생략적 독서 (단지 어떤 일화만을 부각시키는 것)를 행할 수도 있고, 비유적 독서 (은유적이며, 깜짝 놀라게 끝을 맺으면서 우리에게 일깨움을 주는 것)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2. 미니픽션의 특징들


     1971년 『반단편』(Anti-Story)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실험 소설 선집에서 필립 스티빅은 극도로 짧은 소설을 문학 실험의 가장 획기적이고 과감한 전략으로 지적한다. 이후 최근 20년 동안 이런 글쓰기 형태는 습작품이라는 초기의 오명을 벗었고, 이제는 유명 작가들까지 ‘미니픽션’ 작가의 대열에 가세하고 있다. A4 한 페이지라는 분량이 문학이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는 충분한 분량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때, 극도로 짧은 텍스트들은 엄청난 교육적인 힘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했다. 특히 아포리즘이나 예언 혹은 신화 텍스트에서 이런 형태는 커다란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매우 짧은 에세이도 모습을 드러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나 버지니아 울프 혹은 옥타비오 파스와 같은 작가들의 극도로 간결한 에세이 풍의 작품들은 이 작가들의 긴 텍스트들과 경쟁할 정도로 뛰어나다.


     그런데 왜 이런 유명 작가들이 미니픽션에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서사 전략과 미니픽션의 서사 전략이 공통점을 갖기 때문인 것 같다. 베네수엘라의 문학 비평가인 비올레타 로호는 미니픽션의 특성을 네 가지로 지적한다. (a) 극히 짧을 것 (b) 언어를 경제적으로 사용할 것 (c) 독자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 것 (d) 핵심만 말할 것. 그러면서 그는 이런 미니픽션 속에는 다음과 같은 전략이 사용되고 있다고 덧붙인다.


     (1) 상호텍스트성의 다양한 전략 (장르 혼합, 인용, 패러디)

     (2) 상이한 종류의 메타픽션 (서술적 차원에서는 독자와의 대화나 글쓰기의 형식에 관한 것이 있고, 언어적 차원에서는 동음 반복과 같은 언어적 유희)

     (3) 다양한 종류의 의미론적 애매성 (뜻하지 않거나 수수께끼 같은 결말)

     (4) 여러 종류의 유머와 아이러니


     한편 미니픽션의 전문가인 멕시코의 라우로 사발라(Lauro Zavala)는 이탈로 칼비노의 『밀레니엄을 위한 여섯 가지 제안』을 패러디한 「미니픽션을 위한 여섯 가지 제안」에서 미니 픽션의 특징을 크게 여섯 가지로 분류한다. 즉, 간결성, 다양성, 참여성, 분산성, 신속성, 가상성이다. 여기에서 간결성, 다양성, 신속성은 미니픽션의 글쓰기 문제와 관련이 있고, 참여성, 분산성, 가상성은 미니픽션의 효과적 측면과 관련되어 있다. 이 여섯 가지는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연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특징을 중심으로 살펴볼 때, 미니픽션은 현대 문학이 추구하는 서술 전략과 전혀 차이점을 지니지 않는다. 단지 차이라면 분량이 굉장히 짧고, 그 제한된 공간 내에서 바로 현대 문학의 서술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살펴본다면 축소 지향의 미니 픽션은 ‘보다 적게, 보다 많이’를 외치는 21세기 문명 정신과 조화될 수 있는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몇 가지 예를 통해 살펴 본 미니픽션의 특성


1) 간결성과 다양성


     미니픽션에 관한 모든 비평을 읽어보면 이것이 여러 장르를 혼합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미니픽션은 다양한 장르를 픽션화시킬 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로 구분되기도 한다. 그래서 종종 미니픽션은 단편소설, 에세이, 산문 시 선집에 동시에 등장하기도 한다. 현대 문학에서 이런 다양성의 대표적인 예는 야수와 우화의 사용이다. 이것들은 라틴아메리카적인 우화의 글쓰기라는 전통에 입각해 있다. 특히 식민지 시대와 19세기 후반동안 원주민 공동체 내부에서 정치적 의도를 지녔던 우화적 글쓰기이다.


     이렇듯 우화와 야수를 이용한 미니픽션의 대표작으로는 아우구스토 몬테로소의 「공룡」(El dinosauro)이다. 이 작품 전문은 “눈을 떠보니 공룡은 아직도 거기 있었다”이다. 모두 여섯 개의 단어로 이루어졌다는 의미에서 이 작품은 간결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시된 자료를 가지고 독자는 제대로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다. 여기에는 갑작스런 결말도 없으며, 구체적인 사회, 역사적 상황도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 작품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으며, 이 작품의 다원적 의미는 그 작품을 읽는 독자의 상황과 지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 작품이 어떻게 해석될 것인지는 바로 ‘공룡’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에 달려있다. 공룡이란 억압적 체제가 될 수도 있고, 거대한 자본주의도 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지난 70년간 멕시코의 정권을 잡았던 제도혁명당이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자, “눈을 떠보니 공룡의 사라지고 없었다”라고 몬테로소의 작품을 패러디하기도 했다. 다원적 의미를 지닌 문학이 반드시 실험적인 구조와 문체를 사용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화의 형식을 차용한 한 문장의 미니픽션으로도 표현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2) 다시 쓰기: 고전의 패러디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다시 쓰기란 60년대 말 고갈된 문학에 새로이 활기를 넣어주었고, 상호텍스트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시킨 글쓰기이다. 이런 글쓰기 양식은 미니픽션에서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옛 것을 그대로 쓰는 방식이 아니라, 이전의 텍스트를 현재의 상황에 맞게 변형시키면서 패러디한다. 이런 글쓰기는 보르헤스의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는데, 흥미롭게도 이 단편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미니픽션에서 패러디된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미니픽션을 이야기할 때면 흔히 카프카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에서 카프카의 장편 소설이 평가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그가 유작으로 남겨놓은 초단편들이 많이 거론된다. 그 초단편들 중에는 「산초 판사에 관한 진실」이란 작품이 있다.


산초 판사는 절대로 잘난 체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밤과 낮에 쓴 엄청난 분량의 기사와 도둑놈들의 이야기 덕택에 자신을 악마에게 떼어놓을 수 있었다. 그 악마는 후에 돈키호테라고 불렸는데, 그는 광적인 모험에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미리 정해 놓은 대상이 없었고, 그런 대상이 바로 산초 판사가 되어야 했기에, 그는 아무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산초 판사는 일종의 의무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돈키호테의 모험에 함께 따라가야만 했고, 그로 인해 죽을 때까지 커다란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다.


     카프카는 이렇게 짧은 공간 속에서 우리에게 돈키호테의 또 다른 판본을 제시한다. 즉 산초 판사를 중심으로 서술하면서 그를 돈키호테라는 인물의 창조자이며 소설의 작가로 탈바꿈시킨다. 즉 돈키호테는 산초 판사의 자아의 해방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세르반테스를 사로잡았을 현실과 환상의 두 차원을 서로 교차시키면서, 세르반테스의 소설을 변화시킨다. 사실 돈키호테는 산초의 악마이며 동시에 그의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허구 속의 산초 판사는 현실적 차원과 마찬가지로 돈키호테와 함께 다닌다.


     이렇게 카프카는 모든 독자들이 잘 알고 있을 고전 작품으로 출발한다. 바로 여기에 패러디적 행위가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보여주듯이 카프카는 다시 쓰기를 연습한다. 이제 돈키호테를 주제로 쓴 작가는 세르반테스가 유일한 인물이 아니다. 이미 4세기 전에 세르반테스가 받은 직관은 긴 형태와 짧은 형태로 수없이 반복되어왔으며, 아직도 그것은 계속되고 있다. 이런 공식 중에서 가장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주 짧은 형태의 글, 즉 미니픽션이다. 멕시코의 작가 후안 호세 아레올라는 「둘시네아 이론」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 필요가 없는 외딴 장소에 평생 한 여인을 피하면서 살아온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여자보다 책을 읽으며 기쁨을 만끽했으며, 편력 기사가 떠돌아다니는 여자 귀신을 덮치거나, 덕행을 베풀거나 여자와 사랑을 할 때마다 너무나 기뻐했다. 그런 것이 바로 무훈과 거짓말과 억지로 가득 찬 400페이지를 읽으면서 그가 기다리는 것이었다.


    늘그막에 들 무렵, 현실 속의 어느 여인이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무 핑계나 대면서 그의 숙소에 들어와서 땀과 양 냄새로 온통 그 방을 전염시켰다. 그것은 태양에 그을린 젊은 여자의 흥분한 냄새였다.


    그러자 기사는 이성을 잃었다. 하지만 자기 앞에 있는 여자를 붙잡는 대신, 책에서 얻은 환상을 쫓았다. 그는 먼 거리를 걸어갔고, 양과 풍차를 칼로 찔렀으며, 수많은 떡갈나무를 베었고, 서너 번 헛발질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무런 성과도 없이 모험에서 돌아오자, 그를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죽음이었다. 그는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우렁찬 목소리로 유언을 남겼다. 그에게는 바로 그런 시간만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먼지로 가득한 여자 목자의 얼굴은 진정한 눈물로 범벅이 되었고, 미치광이 기사의 무덤 앞에서 아무런 쓸모도 없는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도 스페인 문화의 가장 중요한 작품을 재창조하기 위해 매우 간단한 형식을 사용한다. 이렇게 과거의 작품을 다시 쓰기가 바로 현대 라틴아메리카 미니픽션의 기본적인 서술 방식중의 하나이다. 이런 예는 아레올라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마르코 데네비를 통해서도 우리는 다시 쓰기의 또 다른 예를 발견할 수 있다. 「세르반테스의 선구자」라는 제목의 이 미니픽션은 그의 책 『위조』에 수록된 것이다.


토보소란 마을에 로렌소 코르추엘로와 프란시스카 노갈레스의 딸인 알돈사 로렌소라는 젊은 여자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기사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던 탓인지,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자기를 토보소의 둘시네아라고 불렀으며,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를 공주처럼 다루고 자신 손에 입을 맞추라고 모든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그녀는 서른 살이었고 얼굴에는 곰보가 패어져 있었지만, 자기를 예쁘고 아름답다고 여기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멋진 남자를 머릿속에 그렸고, 그에게 만차 지방의 돈키호테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녀는 드골 지방의 아마디스나 티랑 르 블랑처럼 돈키호테는 결투와 모험을 찾아 머나먼 왕국으로 떠났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자기의 연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하루 종일 창문을 내다보며 지내곤 했다. 그런데 그녀의 곰보에도 불구하고 인근에 살던 어느 젊은 양반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자기를 돈키호테라고 소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낡은 갑옷을 입고 비쩍 마른 말에 올라타고는 상상 속의 돈키호테가 이루었을 업적을 그대로 반복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리고 자기의 계략이 성공할 것을 확신하자 토보소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둘시네아는 사흘마다 일어나는 고열로 이미 세상을 떠나 있었다.


    이렇듯 독일어를 쓰는 프라하 작가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멕시코 작가, 그리고 아르헨티나 작가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패러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패러디를 통해 그들은 서로 다른 세 가지의 『돈키호테』를 창조하고 있다. 즉, 카프카의 작품에서는 산초 판사가 돈키호테를 창조하고, 아레올라의 작품에서는 시골 처녀가 키하노를 편력 기사로 만들며, 데네비의 작품에서는 기사 소설에 대한 광적인 독서가 키하노가 아닌 알돈사에게 영향을 끼쳐 돈키호테와 같은 인생을 살게 만든다. 이렇듯 현대 미니픽션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과거의 텍스트를 현대적 관점에서 다시 서술하는 작업이다.



3) 존재론적 글쓰기와 기원론적 글쓰기


    흔히들 ‘미니픽션’이라는 말을 들으면 콩트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게 여길 것이다. 사실 콩트는 어딘지 모르게 가벼운 느낌이 들지만, 미니픽션은 전혀 가볍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특히 인간 존재의 초월적 비전을 제시하는 작품을 읽을 때면 더욱 그렇다. 그런 작품들은 존재의 마지막 의미와 마주친다. 그것은 개인의 에피소드도 아니며, 장식적이지도 않고, 언어적 모험을 감행하지도 않는다. 이런 글쓰기는 보다 심오한 질서와 관계되어 있다. 즉, 신화적, 종교적 의미를 불어넣는다. 기원론적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 이런 미니픽션은 존재의 극단에 관한 깊은 생각의 징후를 보여준다. 이런 개념을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은 바로 멕시코의 작가 호세 에밀리오 파체코의 작품 「예리고」이다. 그는 여기서 우리 운명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


가을의 오솔길을 걸으면서 H는 스치기만 해도 부서지는 낙엽을 밟는다. 나무에는 정오의 햇빛이 빛난다. 구름은 한데 모였다가 이내 흩어진다. 그는 숲 한 가운데에서 가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장소를 발견한다. 그러자 상큼한 풀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담배를 피며, 숲의 적막을 듣는다. 이런 고즈넉함을 방해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온 세상은 질서정연하기 그지없다. 그는 눈을 돌려 풀밭 속의 오솔길을 바라본다. 개미들이 지하도시까지 죽은 풍뎅이의 몸을 옮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근처에 있던 다른 개미들은 자신들의 더듬이와 부딪쳐가면서 가벼운 나뭇잎들을 끌고 간다. 그리고는 터널 입구를 보호하고 있는 모래 언덕에 그것들을 쌓아놓는다. 그들의 일치된 노력과 체계적인 명령과 단결된 힘은 감탄할 만하다. 개미집에 음식을 비축하는 이런 노력은 몇 시간, 아니 몇 세기 전부터 해온 일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시간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일에 열중한 나머지 개미들은 그에게 최소한의 해를 끼치려고 하지도 않고, 그런 것에 관심도 없다. 그러나 그는 억누를 수 없는 충동에 휘말려 손가락으로 개미 한 마리를 집어 엄지손가락으로 짓누른다. 그런 다음 담뱃불로 개미떼를 지지기 시작한다. 그러자 개미들은 먹이를 놔두고 대열을 이탈한다. 이런 공포와 무질서를 보자 그는 쾌감을 느낀다. 그리고는 개미집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려고 애를 쓰는 개미들을 불로 태운다. 살아있는 개미들이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게 되자, 그는 힘없는 모래 언덕을 헤치고 은밀하게 숨겨진 개미집과 그들의 곡간을 찾는다. 온 개미 마을이 그의 파괴적 광기에 굴복하고 만다. 그는 성난 듯이 개미집을 헤집고, 그러자 개미들의 통로는 흙과 함께 뒤섞여버린다. 그는 수천 마리의 개미를 죽였고, 살아남은 개미들도 다시는 절대로 대지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곳을 떠나기 전에 마른 나뭇잎을 한데 모아 불을 붙인다. 공기는 개미냄새로 가득 차고, 개미의 시체들을 불태우며 재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한시간 반이 지나자, 그는 도시를 에워싸고 있던 산들이 모두 불길에 휩싸인다. 검은 연기가 그를 삼켜버리기 전에, 잠시 그는 벼랑에 서서 혼란스런 도시를 바라본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화염과 불타버린 벽과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과 공중에 가만히 있는 태양을 향해 솟아오르는 연기와 재를.


    한편 새로운 신화를 구성하려는 듯한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도 있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력을 새롭게 수립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는 우루과이의 여류작가인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의 「지도」이다. 여기에서 그녀는 시지푸스의 신화를 창조적으로 재가공하면서 현대인의 존재에 관해 의문을 던진다.


그는 어깨에 우주를 짊어지고 있다. 그는 아무도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다가 그는 수차에 걸쳐 균형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우주를 어깨에 짊어진다는 것은 극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힘든 작업이다. 한 눈을 팔아서도 안되며, 호숫가로 산책을 나가거나 그곳에서 쉴 수도 없으며, 여행의 기쁨을 누릴 수도 없고, 그 이외의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다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관공서에서도 일할 수 없으며, 자기 마음대로 피라미드를 기어오를 수도 없다). 그는 아내를 구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아이도 없다. 그리고 그것은 침묵을 요하는 작업이며, 찬란한 빛을 낼 수 있는 작업도 아니다. 그래서 연말이 되어도 축하 카드나 보너스 혹은 특별상도 받지 못한다. 마치 화장실 청소부가 아무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듯이, 우주를 자기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그도 사람들의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그와 청소부는 자신들이 조용한 업무를 수행하지만, 그것이 불가피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가 항상 우주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런 의무감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단지 색 바랜 이미지만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우주를 짊어지는 고통이 기억을 사라지게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우주를 짊어져야 하는 사람이 왜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가 되어야 하느냐고 따지지 않는다. 그는 체념하듯이 받아들인다. 아마도 그것은 사물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지 않는 숙명론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가끔씩 산책을 하거나 휴가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만, 그래도 모든 정신을 집중하여 충실하게 자기 일에 충실한다. 그는 자기 일의 본질에 관해 아무와도 설전을 벌이지 않지만, 누군가가 그가 어깨에 무거운 우주를 짊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미소짓는 모습을 보길 좋아한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리고 사실 일어나지 않는다), 풀이 죽지 않는다. 그는 세인들의 쾌락이나 (어쨌거나 그의 일의 특성상 그렇게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편리함과 사치와 육체에 대한 탐닉을 현명한 무관심으로 대처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어떤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 일에 그 어떤 신비적인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 아마도 자신이 특정 종교나 정치 흐름의 기원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제 그의 건강은 쇠약해지고 있고 (그도 모든 사람들처럼 죽을 운명이다), 그래서 누가 그를 대체할 사람인지 자기 자신에게 물어본다. 그는 자손도 없고, 또한 그런 일이 대를 이어 물려줄 일이라고도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선택하는 일도 사회적이거나 지적, 혹은 정치적 특권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는 그것이 힘들고 보람 없으며 돈도 벌지 못하지만, 선택의 여지없이 자기가 해야 할 유일한 일임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조상이 누구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누가 자기의 일을 이어받을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늙었기 때문인지, 어느 날 어깨에 우주를 짊어지기 시작했던 어린 아이를 특별한 애정으로 기억한다. 그는 이런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일에 전념하는 남자와 여자들을 그 어떤 방식으로도 평가하지 않는다. 그가 가장 괴로워하는 것은 영화관에 갈 수 없는 것뿐이다.


    우리는 페리 로시의 작품을 상이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평범한 언어를 통해 고대 신화를 재점검하면서 현대인에게 존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또한 우리는 이 작품에서 패러디적인 글쓰기와 유머의 효과를 엿볼 수도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훌륭한 미니픽션들은 거의 대부분 장르에 따른 분류가 불가능하다. 이 작품도 에세이 같기도 하고 픽션 같기도 하다.



4. 미니픽션: 21세기의 문학이 될 것인가


    미니픽션에 관한 최근의 연구들은 하나같이 미니픽션이 아직은 단편소설의 장르에 속하고 있지만, 곧 독립된 장르가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소설(novel)과 중편소설(nouvelle)이 다르듯이 단편소설과 미니픽션도 매우 다르므로,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자리를 잡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장르가 뒤섞이는 현대 문학에서 미니픽션이 하나의 장르가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보다는 왜 미니픽션이 최근 들어 위세를 떨치고 있으며, 앞으로 그 가능성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점에서 많은 연구가들은 미니픽션이 사이버시대에 가장 적합한 형식이라고 말한다. 즉, 분량이 길어 커서를 내려가면서 읽는 소설과는 달리, 모니터에 모든 내용이 모두 들어오면서 예술성 또한 기존의 장편 소설 못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미니픽션은 사이버소설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사이버소설은 독자와 작가의 쌍방향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여기에는 독자가 작품을 해석할 뿐만 아니라 텍스트에 직접 관여하여 자신의 텍스트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게임처럼 독자가 원하는 대로 텍스트를 확산시킬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이버 소설은 아직 다원적 의미의 문학으로는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반면에 미니픽션은 독자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여 현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데는 성공하고 있지만, 독자와의 교감을 통한 창작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미니픽션이 21세기 문학의 주인공이 되느냐, 아니면 그냥 잠시 유행했다가 사라지는 운명을 맞느냐의 문제는, 사이버소설의 장점을 얼마나 잘 이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니픽션이 사이버소설과 하나가 되려는 노력은 문학성이 결핍되었으며, 현실 도피적인 게임에 불과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사이버 소설에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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