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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여성

[책갈피] 2006. 4. 28. 14:51
 

문학과 여성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Cristina Peri Rossi)


     스콜라 철학자들은 여자들에게도 영혼이 있느냐는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논란을 벌였다. 다시 말해서, 여자들이란 동물과 마찬가지로 열등한 존재가 아니냐는 것이다. 여자는 남자를 꼬여 죄를 짓게 만들었고, 여자 한 사람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됐으며, 또 생리를 하고, 지적인 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는 여성 문학이 있는지가 논쟁의 대상이다. 이론적 논쟁이야 어떻든 간에, 현실적으로 보면 세상에 나와 있는 책 가운데 일부는 여자가 쓴 것이다. 여권의 신장과 더불어 이러한 추세는 강화되고 있으며, 고도의 문명 국가, 즉 선진 사회의 여자들은 으레 책을 쓴다. 저술 활동은 전통적으로 남자들의 몫이었으나 이제는, 비록 소수이지만, 여자들도 참여하고 있다.


     이처럼 세상에서 쓰여지고 출판된 책들 가운데 일부가 여자들이 쓴 것이라면, 논의의 핵심은 고유한 특성을 가진 “여성 문학”의 존재 여부이다. 이 문제를 밝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남성 문학”의 특성과 비교하는 일이겠으나, 내가 보기에 이 방법은 다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난관에 부딪친다.


     1) 장구한 세월 동안 문학은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이 기간에 생산된 문학은 방대하고 다양할 뿐만 아니라 작가들의 성향 또한 상이하므로 그 특성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란 불가능하다. 예컨대, 위고, 단테, 다리오(Rubén Darío), 루소, 카프카, 카네티, 코르타사르를 생각해보라.


     2) 남성문학(역사상 유일한 지배 문학)의 특성은 미학적 경향, 심리적 요인, 각 사회의 역사적 발전 단계, 특정 언어 집단의 언어 변천에 의존하므로 개별 작가가 다루고 있는 주제, 시대, 문학적 경향을 고려하지 않으면 남성문학의 성격을 규명할 수 없다.


     3) 남자가 되거나 여자가 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며, 각 성(性)은 분명 다양한 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남자들이 쓴 문학을 모두 “남성문학”으로 환원하고 여자들이 쓴 문학을 모두 “여성문학”으로 환원하는 것은 이와 같은 성 형성 방식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며 성적 다양성을 백지화하는 일이다. 다양한 성을 남성이나 여성으로만 한정하는 것은 묵과할 수 없는 단순화이다.


     고유한 특성을 지닌 여성문학의 존재여부를 알려면 비교의 방법보다 더욱 타당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언어 공동체 차원에서 그리고 사회적,문화적 발전 차원에서 여성문학의 특성을 분석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한 가지 예외가 있다. 역사적,사회적 요인이 예술에 미치는 영향은 미약하고 간접적이라는 사실이다. 사회경제적으로 저발전된 사회라고 해서 반드시 문학이 빈곤한 것은 아니다. 라틴아메리카가 좋은 예다. 예술 작품에서는 비합리적이고 주관적인 요인이 흔히 사회경제적 요인보다 훨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따라서 여성이 소외된 사회, 여성이 완전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회에서도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여류 작가가 나타날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여성과 문학이라는 주제를 얘기하려면 각 공동체 내에서 (아르헨티나와 엘살바도르, 멕시코와 파라과이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분석해야 하며, 이러한 상황이 여성 문학 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야 한다. 둘째, 우리 여성들은 각자 여자로서, 여류작가로서 자신의 처지와 경험을 증언해야 한다.



한 가지 접근 방법 : 정체성 추구로서 여성의 글쓰기


     예술은 처음부터 인간 존재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훌륭한 방식이었다. 예술을 통해서 인간은 나는 누구이며, 세계는 무엇인가라는 자못 궁금한 질문에 대답할 수가 있었다. 알타미라노 동굴에서부터 카바피의 시작품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창조란 전통과 독창성의 변증법이다. 인간은 예술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고, 비록 부분적이나마 정체성을 확립하고, 타자 앞에서 자신을 밝히며,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표현과 전달이란 예술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기능이다. 노동과 노동 생산물 그리고 예술적 충동과 작품의 차이는 노동이 항상 소외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노동은 인간을 표현하거나 인간의 의사를 전달하기는커녕 사물로부터 인간을 분리시키고 소외시킨다. 반면에 인간은 예술 작품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예술 작품을 통해 인간은 자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으며 우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느낌을 봉합할 수 있다. 인간이라는 드라마의 본질적인 조건은 분리감인데, 예술 작품에서 일체감을 경험함으로써 얼마간 위안을 얻는다. 그래서 플로베르는 “보봐리 부인은 나”라고 단언할 수가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예술적 창조는, 다른 것도 그렇지만, 인간의 한 부분, 즉 남자들이 독점했다.


     여자의 창조적 능력은 재생산에 한정되었다. 다시 말해서, 여자의 사회적 역할이란 출산이었다. 지금도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에서 여자들은 이런 역할을 할뿐이다. 창조적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여자들은 극소수이며, 상호 교류도 없다. 고대로부터 가부장 사회에서 (아직도 대부분의 사회는 가부장제이다) 시행된 분업의 결과, 남자는 세상을 맡고 여자는 가정과 출산을 책임졌다. 남자들은 항상 외부 세계를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했다.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분배수단을 지배하고, 자본을 소유하고, 전쟁을 하고, 타인의 영토를 침입하고, 정치적․종교적 권력을 유지하고, 지상의 다른 종을 제거하고, 법률을 만든 사람은 바로 남성이었다. 여자는 항상 협소한 가족 관계 속에서 자신을 존재를 확인하는 (딸에서 아내로, 어머니로 할머니로) 반면에 남자의 정체성은 일, 직업, 관심, 정치적 지위, 재산 소유 등 외부 세계와 관련된다. 예술은 남성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가장 정교하고 복잡한 방식으로써 과학, 탐구, 전쟁과 마찬가지로 남성이 독점하던 영역이었다.


     분업으로 인해 여자는 세계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내가 어렸을 때 여자가 열등하다는 증거는 음악사, 미술사, 과학사, 정치사에 여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여자들이 집안 일을 돌보며 순종하며 살아온 세월이 곧 무능력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었다. 설거지하는 소리, 아이들 우는소리, 바가지 긁는 소리는 곧 역사적 인물 가운데 여자가 없다는 소리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여자가 열등하다는 증거이다 (스콜라학자들은 여자들이란 개와 마찬가지로 영혼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는 전형적인 흑인 노예상의 논리이다. 하루에 16시간씩 일을 시키고 변변찮은 음식을 먹이고 노예시장에 내다 팔면서도, 흑인들이 열등하다는 증거로 흑인 의사나 흑인 변호사가 없다는 현실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아 극히 최근에 여자들이 글을 쓰기 시작한 문학의 영역에서 이처럼 여성이 세상에서 고립되고, 힘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


     사회적으로 예술적 창조는 여자아이들 몫이 아니었다. 예컨대, 고전시대 여자아이들은 춤과 노래를 배웠으나, 이는 자신을 표현하거나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 굴종과 예속 이상의 무엇이었다.


     예술 창조의 영역은 자유의 영역이다. 따라서 좌파든 우파든 독재정권은 이러한 활동을 탄압한다. 자기만의 생각이나 감성이나 의식이 없는 사람 그리고 자유로운 세상에 살지 않는 사람은 예술가가 될 수 없다. 여자들에게는 이러한 자유가 결핍되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뛰어난 인물이 없다. 아무런 위협이나 처벌 없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을 갖춘 사람만이 창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창조는 독립과 자율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몇몇 사회에서는 여자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들이 얼마간 성숙하기도 했다. 그러자 미약하지만 끊임없이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은 경우 이런 여자들은 권리회복을 주장하는데 이는 당연하다. 여자들은 세계의 다원성을 얘기하기 앞서 자신들 얘기를 한다. 전에는 목소리가 없었으나 이제는 말할 수 있고 또 자신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도 넘게 여자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어떤 형태의 권력도 갖지 못했고, 따라서 세상을 바꾸고 변혁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었다는 사실이 문학의 영역에서 특별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생각한다. 예로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겠다. 여자가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 같은 작품을 쓸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대답은 분명하다. 오로지 남자만이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다. 재능이나 유전자 탓이 아니라 여자와 남자의 사회적 조건 때문에 그렇다. 조셉 콘래드와 같은 재능, 사물을 보는 눈을 가진 여자들이 많이 있지만 그 어떤 여자도 스무 살 나이에 혼자 배를 타고 (다시 말해서, 아버지나 남편이나 오빠나 친지나 가정교사 없이) 카리브해를 여행하면서 섬을 둘러보고 섬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자유를 만끽하고 모험을 즐기고 마음껏 상상력을 펼칠 수는 없다. 이것이 외부 세계에서 여자를 배제하는(전혀 호의적이지 않은) 또 다른 방식이다. 여자의 사회적 종속은 앎의 가능성, 나아가서는 여행의 가능성까지 제한한다.


     여자는 외부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수십 세기 동안 대학이나 전문직이나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이 모이는 살롱에도 여자는 없었다. 실험실처럼 중요한 기관에도 여자는 없었다. 내부 세계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내부 세계는 상당 부분 외부 세계에 의존하며, 외부 세계가 제공하는 자극에 의존한다. 내부세계는 외부 세계와 변증법적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객관적인 정보를 제한하면 내부 세계는 풍요로울 수 없다. 정보와 지식 부족, 교류 부족, 반복되는 일상과 복종은 어떤 내부 세계라도 빈곤하게 만든다. 그래서 여자들은 지식 대신에 상상에 의존하고, 정보 대신에 직관에 의존하게 되었다. 남성이 글을 쓸 때는 외부 세계를 반영하고, 필요하다면 아무런 도덕적, 문화적, 사회적 제약을 받지 않고 세상 경험을 할 수 있다. 전적으로 남자들만의 영역에서 모험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여자들은 어떤 모험을 할 수 있을까? 언제나 내면적인 모험이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여성들은 남성문학을 채우고 있는 저 바깥 세상으로 나갈 때는 엄청난 사회적 제약을 받는다.


     수많은 여자들은 아직도 시간의 주인이 아니며 (사회적으로 아무런 보상이 없는 노동에 종사한다), 특수하고 고유한 물리적 공간의 주인도 아니다. 시간과 공간은 창조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좌표인데도 그렇다.


     비평가들이 (비평계 역시 전적으로 남성들이 독점하고 있다) 여성문학은 지나치게 개인적인 경험에 의존하고 있다면서 속내적이라고 지적할 때 잊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여자들이 남자들과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영감의 원천은 감정이고 느낌이다. 게다가 비평가들의 견해는 내가 보기에는 불공평하다. 왜냐하면 속내적이고 감상적인 작품은 (그리고 청춘소설이나 연재소설이나 텔레비전 드라마 같은 하위장르들은) 대부분 남자들이 써왔기 때문이다.


     통계상으로 보면, 라틴아메리카에서 (적어도 우리 나라 우루과이에서) 글을 쓰는 여자들은 소설보다는 시를 선호한다. 여류 소설가보다 여류 시인들이 더 많다. 그러나 이 또한 유전적이고 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문제이다. 장르의 우월성을 논하기 이전에, 소설은 여성들이 충족시킬 수 없는 조건을 요구한다. 게다가 시를 쓰는 여자를 “여류 시인”(poetisa)이라고 부르는 것도 다 까닭이 있다. (스페인어에서 여류 시인이라는 단어의 어미는 누가 보아도 경멸적이다. 남자는 “poeta”인데 여자는 “poetisa”, 즉 “하급 시인”이다) 오랫동안 시는 남녀 공히 창작할 수 있는 장르, ‘한번 해보라는’ 부성애적 관용으로 묵인해준 장르였다. (일상 언어에서 남자 시인들을 “남색” 또는 “여자 같은 남자”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명백하다. 편협한 남성 중심 사고에서 보면, 시인은 아주 섬세하고 부드러운 감정이나 느낌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는 여자들이나 할 짓이지 남자들은 할 짓이 아니었다. 강건한 남자가 어떻게 시인이 될 수 있겠는가?)


     얼마 전만 해도 라틴아메리카에서 시를 쓰는 여자는 (중상류 계급의 백인. 이 두 가지는 여성문학이나 남성문학이나 다 같이 필요한 조건이다) 여류 소설가나 여류 극작가보다 눈총을 덜 받았다. 왜냐하면 “시를 읽거나 쓰는 것”은 여성을 한층 우아하고,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매력적으로 만든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집안에 들어앉아서 (그래서 감성적이다) 바느질을 하거나 요리를 하듯이 시를 쓸 수가 있었다. 이 일은 시간도 얼마 빼앗지 않아 가사를 돌볼 수가 있으며, 정치, 전쟁, 과학, 언론, 상업, 섹스하고는 달리 남자들의 경쟁 대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자처럼 소외된 계급이 하급 장르에 진입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류 작가”가 되는 것은 (여기서 여류 작가란 여류 소설가이다) 공개적으로 현행 사회 규범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강한 거부감을 야기했고, 심지어는 여자의 정체성을 의심하기도 했다. 어떤 계급의 여자들이 소설을 썼을까? 이단적인 사람들이다. 무신론자, 공산주의자, 창녀, 다시 말해서 사회의 공적(公敵)이다. 소설을 쓰려면 (소설은 세계의 이미지다) 자유를 쟁취해야 했다. 사회는 이런 행위에 제재를 가함으로써 여자들을 억압해왔다.


     또한 비평은 (여기서 말하는 비평이란 여자들이 스페인어로 쓴 문학 작품에 대한 비평이다) 여자들이 쓴 소설은 너무 표면적이라고, 즉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건의 연속일 뿐 문학적 상징성이 없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평가는 어느 면에서 정확하다. 사실 대부분의 여자들은 표면적인 기법을 즐겨 사용하므로 본질적으로 상징과 해석이 결여돼 있다 (내가 말하는 소설은 개인적인 경험을 담고 있을지라도 자율적인 허구 세계를 창조하는 작품이다). 여자들이 쓴 소설은 자아의 달거리 출혈 같은 것, 자아를 객관화시켜 상징적인 차원에 투영하지 못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비평에 관심이 많다. 우선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다. 앞서 말한 표면적인 성격, 즉 지나치게 스토리 중심적인 서술이 중남미 여성문학의 특징이라면 내 문학은 그지없이 남성적이다. 나는 소설을 일곱 권을 썼으나 한번도 직설적인 기법을 사용한 적이 없다. 오히려 상징적인 작품을 썼다. 내 소설에는 자서전적인 요소는 하나도 없다 (사물을 지각하는 방식이 아니라 일상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모든 지각은 자서전적이다). 게다가 알레고리적인 세계를 수립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내 작품은 남성문학에 속한다. 한 가지, 여성문학의 맹점이라고 지적하는 표면적인 성격은 유전적인 조건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임을 증명하려고 했다는 점을 (이것이 내 의도였다) 제외하면 그렇다. 표면적인 성격은 여성의 역사에서 유래한 것이지 여성의 유전형질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말하고자 했던 요점은 사회적 억압을 통해서 여성을 내부세계에 가두어 두었다는 것이다. (나는 가둔다고 했다. 왜냐하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는 여성이 다른 선택을 하면 처벌했다) 유일한 모험이란 감정이고 정감이다. 최근 여권의 신장과 더불어 여성은 권리회복을 주장하는 문학을 쓰고 있다. 소외된 여성의 역사를 주제로 다루며, 수세기 동안 억압된 주체를 다룬다. 여성은 자신의 상황을 증언하고자 한다. 흑인, 재미 멕시코 교포를 비롯해서 여타 소외된 그룹도 마찬가지 아닌가? 여성문학의 목표는 여자의 조건을 밝히고, 권리회복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여성 문학의 표면적인 성격은 부수적인 요소이지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다.


     세계를 해석하는 것은 지적 행위이며, 이를 위해서는 먼저 세계를 기술하고 반영해야 한다. (개인이나 그룹이나 민족의 발전에서도 그렇다.) 그러므로 여성문학에서 발전적인 세계의 해석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여성 작가는 이보다 한결 시급한 문제에 관심을 쏟는다. 즉,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기술하고 반영하는 일이다. 해석은 브라질 여성 작가 리스펙토르처럼 특출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의 몫이다.


     끝으로, 우리가 소외된 사람이나 억압받는 사람들의 문학에 (물론 여성문학도 포함된다) 특수한 요소로 각인된 사회적․역사적 요인들을 무시한 채 남성문학과 여성문학의 차이를 운운하는 것은 위험하며, 나아가서는 망발이라고 생각한다. 위험한 까닭은 이러한 구별은 자칫 소외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망발인 까닭은 평등한 세계에서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아직도 평등하지 않다) 예술 작품을 놓고 성적 차이를 따지는 일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스카 와일드의 동성애가 『정직의 중요성』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 밝히는 작업은 파시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알프레드 더글라스에게 보낸 편지 『심연에서』는, 글자 하나 수정하지 않아도, 경박하고 이기적인 영국 숙녀에게 보낸 편지로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