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과 페미니즘 문학
인류학과 페미니즘 문학
루이사 발렌수엘라(Luisa Valezuela) / 박병규 옮김
우리 여자들은 비밀을 못 지킨다는 게 일반적인 속설이다. 그러나 수많은 고대 신화를 보면 최상의 비밀에 속하는 신앙 대상은 우리 여자들 소유였다. 다시 말해서, 우리 여자들이 비밀을 관장했다.
최초로 가면을 만든 사람도 다름 아닌 여자들이었다. 부족을 즐겁게 하고, 또 가르치려는 목적이었다. 여자들이 가면을 창조했다면, 최초로 전쟁을 일으키고 이웃 부락을 약탈하러 나선 이들은 남자들이었다. 아득한 옛날 부족 시대에 어머니는 딸자식을 우대했으며, 오로지 종족보존이란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남자들이 필요했다. 가임 여성만 많다면 원기 왕성한 남자 몇 사람만 있어도 종족을 유지하고, 신성한 불을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전쟁 양식의 도래와 더불어 역할이 전도되었다. 남자들의 손에 달린 부족 방어가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이상은 인류의 육체,정신,문명의 흐름에 대한 개괄이다. 그러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배후에서 작용하는 그 무엇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왜냐하면 어느 날, 다시 말해서 원시 문화(대부분 ‘원시’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지만)의 신화 시대에 예상한대로 여성과 남성은 충돌했고, 용감무쌍한 남자들은 가면을 빼앗아 산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이 남자들은 짐승의 피와 이빨과 발톱과 불에 탄 나뭇가지로 가면을 장식하고 백주 대낮에 마을로 돌아와 여자와 어린아이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었으며, 그후 지금까지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고단한 처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종교형태론』에서 “이같은 신화는 양성 사이의 종교적 대립만을 함축하고 있지 않다. 성(聖)의 측면에서는 원초적으로 여성이 우월하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여성의 우월성에 대한 인식은 인류 역사에서 오래 가지 못했다.
여성의 위대한 창조물인 가면은 일종의 언어이다. 그런데 남성은 이 언어(가면)를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완전하게 다듬었다(여기서 말하는 남성이란 종으로서의 수컷을 의미할 뿐, 우월성을 내포한 일반적인 용법은 아니다).
마이클 타우시그(Michael Taussig)도 『마멸』(Defacement)에서, 다윈을 아주 놀라게 한 티에라 델 푸에고 지방의 원주민 셀크남 부족의 신화에 근거하여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한, 이와 유사한 신앙은 ―아마도 원초적 모계 시대의 유산일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뉴기니아, 적도 아프리카와 아마존 유역에 널리 산재한다. 이처럼 다양한 지역에 분포한다는 사실은 인류에게 공통된 기억이 있다는 증거이다.
티에라 델 푸에고의 신화에 따르면, 옛날 이슬라 그란데(Isla Grande)에서는 여자들이 비밀을 관장했으며, 이른바 ‘진실극’을 주관함으로써 샤만적이고 주술적인 권능을 독차지하였다. 지식과 권력 또한 여자들 수중에 있었다. 따라서 비밀을 관장하던 여자들이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행사하였다. 남성들은 단지 ‘진실극’의 관람객이었으며, 여성들과 함께 혜택을 보던 사람들이었다. 신 내린 가면을 쓰고 공연하던 ‘진실극’에서 “연극적 환영이라는 현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이 있었다. 적어도, 신화가 얘기하듯이, 어느날 밤 남자들이 철저하게 통제되던 비밀을 알고 싶은 열망 때문에 성인 여자들은 모두 죽이고 나이 어린 여자아이들만 살려두는 비극이 일어날 때까지는 그러하였다. 다른 일도 그렇지만, 남자들은 가면을 소유하고 ‘진실극’을 주재함으로써 주술을 부렸다. 비밀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학살과 약탈의 순간에 공포와 억압의 사회 구조가 생겨났다. 아니, 보편화되었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무지하다고 몰아세웠고, 여자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척하였으며, 남성들은 이를 믿는 체하였다. 그리하여 “모두가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다”는 ‘공공연한 비밀’이 생겨났다. 다시 말해서,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모순어법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공공연한 비밀을 유지하려면 비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억압적인 조치를 취해야만 하며, 따라서 권력은 갈수록 공포와 폭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은 인류는 없다. 적도 아프리카에서는 오늘날에도 소위 비밀단체들이 이런 일을 자행하고 있다. 익히 알고 있듯이, 권위주의적인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타우시그 말을 인용하면, “지식 자체는 권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애써 모르는 체하는 것이 권력을 낳는다”. 여기에 패러독스가 있다. 비밀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비밀이 존재한다는 의식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를 애써 모른 체함으로써 비밀은 없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어야 한다.
이 모두가 문학이라는 물레방아를 돌리는 원동력이다. 문학은 비밀과 비밀 숭배자로부터 최대한의 주스를 짜내려고 한다. 주스를 짠다는 말이 곧 비밀을 고갈시킨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비밀은 자가 생산되기 때문이다.
철학자이자 아프리카의 예술과 신앙을 연구한 인류학자인 체사레 포피(Cesare Poppi)의 「시그마!」(Sigma! The Pilgrim's Progress and the Logic of Secrecy)라는 논문을 보면 문학이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이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입문자들이 배우는 것은 ‘새 세계’의 존재가 아니다. 새로운 해석 방법을 통해서 구세계를 다르게 조망하는 법을 배운다. 이 경우 비밀이란 실제적인 의미가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틀이다.”
타우시그와 같은 아프리카의 신앙 연구자와 마찬가지로 시인이나 작가들에게도 문제는 비밀의 내용을 알려는 것(불가능한 시도이다)이 아니다. 그보다는 비밀이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지 알려는 것이다. 그리고 글을 통해서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문제이다.
그러면 가면의 본질을 언어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가면을 전쟁과 관련시켰으므로, 이제 언어를 전쟁, 그 중에서도 품격 있는 전쟁론과 관련시켜 보자. 문학 창조 또한 전략을 만들고, 이를 적용시킨다는 점에서 전쟁론과 유사하다. 문학 창조에서 전략은 선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솟아 나오는 것이지만 말이다.
콜롬비아의 시인 아르벨라에스(Fernando Arbeláez)가 스페인어권에 소개한 『손자병법』은 미래의 작가에게 교범이 될 수 있다. 『손자병법』은 기원전 텍스트로 “과거사와 미래사를 포함한 영원한 현재”에서 진행된다. 아르벨라에스가 스페인어판 서문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중국어에는 시제가 없으므로 항상 현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위대한 문학과 마찬가지이다. 위대한 문학이란 시제의 변화, 바꿔 말해서 다양한 해석과 이해를 수반하는 독서의 시간을 초월한다.
『손자병법』에는 비밀을 논하는 방(廟)이 등장한다(시계편). 지나가면서 간략하게 언급하기 때문에 놓치기 쉬운데, 이는 어떠한 서술이나 설명도 비밀을 훼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그 방에서 논하는 일을 비밀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글쓰기의 문제로 돌아가서, 손자의 가르침을 따라 세 가지 권고를 할 수 있다.
첫째, “전쟁에 따른 손해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자는 전쟁의 이익도 알 수가 없다”(작전편)는 손자의 말은 무기와 마찬가지로 언어도 양날을 지닌 칼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언어는 우리 작가들의 뜻에 순응하기도 하고, 동시에 저항하기도 하는 이중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만화가 떠오른다. 폰타나로사(Roberto Fontanarrosa) 작품인데, 이 만화에는 이노도로 페레이라(Inodoro Pereyra)라는 엉뚱한 가우초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한다. 그리고 “벼락같은 영감을 받아서 작곡했지”라고 말한다. 그러자 멘디에타라는 개가 옆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다음에 벼락같은 영감이 달려들면 피하는 것이 낫지 않겠어요?”
피하는 것이 낫다. 이 글쓰기 전쟁에서도 유도나 합기도와 마찬가지로 남의 힘을 이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힘과 분노(문학 창작에 필요한 요소이다)에 의해 쓰러지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가 말해야만 하는 것(또는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있도록 하고, 우리들은 쓰고 있는 텍스트를 통해서 그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손자병법』의 두 번째 충고는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부연설명할 필요는 없다. “적군에게서 온 사신이 저자세이면서도 방비를 더하는 것은 진격하려 하기 때문이요. 반대로 적군의 사신의 강경하게 말하며 진격 태세를 취하는 것은 후퇴하려 하기 때문이다.” 행군편의 말이다. 작전편에는 이러한 가르침도 있다. “수레 싸움에서 이겨 적의 수레 10대 이상을 얻으면 우선 얻은 자에게 상을 주고, 그 수레의 기(旗)를 바꾸어 달아 아군의 수레와 함께 같이 타며, 적군의 병사를 잘 대우하여 아군으로 양성한다. 이것을 일컬어, 적에게 이김으로써 더욱 강해진다고 한다.”
이 경우, 말(言語)이 병사이다. 우리 작가들이 배신(말실수)할 수도 있는 병사들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하면, 적은 누구일까? 여기서 연상되는 것은 작가들의 필연적인 적, 즉 ‘말할 수 없는 것’(lo inefable)이다. 무언가를 말하려면 말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장벽 앞에 서 있는 것과도 같은 상태이다. 따라서 말로 만든 은유적 그림을 장벽 위로 던져서 적어도 그곳이 보이지 않는 곳임을 드러내야 한다. 자마이카에서 본 카니발 생각이 난다. 군중들이 어떤 카니발 참가자에게 폭행을 가하다시피 했다. 무슨 망신살이 뻗었는지 모르겠지만, 카니발 무희들이 모두 머리에서 발끝까지 희색으로 치장했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일은 백여명의 카니발 무희들이 행렬 도중에 완전히 붉은 색으로 물들었을 때, 공격이 멈추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변화의 카니발은 처음 보았다. 복잡한 독법이 필요한 의외의 담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피가 결론인 것처럼 보였다.
이 글에서 나는 글쓰기를 전쟁론에 비유했다. 텍스트는 말할 수 없는 것과 전쟁을 벌이는 전장(戰場)이다. 이는 수많은 비유 가운데 하나이다. 작품 창작 과정에서 내전이 일어난다. 이러한 내전에서는 백기를 들고(빨간색으로 물들 수도 있다) 항복하는 편이 낫다. 그래야 타자의 이야기가 서술될 수 있다. 실제 창작에서는 많은 경우 작가의 통제력을 벗어나는(작가가 텍스트를 마음대로 주무른다는 말은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이다) 뜻하지 않은 인물, 반주인공이 등장하여 줄거리를 의심스러운 영역으로 끌고 간다. 이러한 힘에 이끌려 가는 일은 불유쾌하고 당혹스러운 일이다(그것이 언어이다). 이야기는 작가의 의도에서 빗나가지만, 그렇다고 원래의 줄거리로 되돌아가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어줍잖은 일이다.
앞에서 나는 글쓰기를 가면에 비유했다. 각각의 텍스트는 어떤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까? 이탈로 칼비노는 “힘의 장, 즉 서술의 장”에 직면했을 때, 그렇게 되물었다. 다시 말해서, 작품에 등장하는 어떤 대상이 일종의 자장(磁場)을 형성하고, 이 자장에서 작가는 유례없는 반향을 끌어들이는 일종의 안테나 변하는 현상에 직면했을 때, 그렇게 되물었던 것이다.
이처럼 가면은 안테나이기도 하다. 적어도 옛날옛적부터 그렇게 간주했다. 가면을 쓰고 춤추는 사람은 ‘나’가 아니다. 춤추는 사람은 내가 재현하는 정령이다. 내가 얼굴에 가면을 착용하는 순간부터 나를 이끄는 정령이다. 따라서 여자로서, 여성 작가로서 나는 아득한 옛날 신화 시대에 탈취 당한 비밀의 가면을 되찾는 데 관심이 있다. 여기와 저기, 티에라 델 푸에고를 비롯해서 이 세상 어느 곳에 가든지 그러한 가면을 되찾으려고 한다. 아무튼 우리들은 페르소나(persona)라는 단어의 뜻이 원래 가면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 비극에서는 ‘프로소폰’이었고, 로마의 희극에서는 ‘페르소나레’였다.
뉴질랜드 여행길에 오크랜드(Auckland)시에 들렀다가 와레 와카이로(whare whakairo)라는 화려한 건물을 보았다. 마을의 여러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하는 공회당 같은 곳인데, 건물 안에는 각 부족―카누라고 한다―의 신을 새겨놓은 나무 판자가 있었다.
모두 남성 신일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물론 아니다. 이 건물의 안쪽 어두침침한 구석에 죽음의 여신(Hine-nui-te-Po)이 있었다. 이 여신의 다리 사이에 있는 도마뱀이 전설적인 영웅 마우이(Maui)이다. 마우이는 여신의 몸 속에 들어가 심장을 꺼내오려고 도마뱀으로 변하였다. 죽음의 여신 심장만 있으면 모든 인간이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의 여신은 이빨이 달린 성기로 담대한 영웅의 목을 잘라버렸고, 우리 인간은 모두 슬프고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습관’ ―환언하면, 비밀의 어머니―에 물들게 되었다.
마우이의 전설은 예상한 일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은 다른 일, 즉 종종 신화적 시간은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매번 재생된다는 사실이다. 녹색 융단이 펼쳐진 듯 아름다운 뉴질랜드의 경치를 둘러볼 때는 해밀턴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마오리 여성 센터’의 정신적 지주인 히네위랑지(Hinewirangi)라는 혁명적인 시인을 만나리라고는 예상조차 못했다. 내가 그곳을 찾았을 때, 히네위랑지는 뚱뚱한 몸매에 회색 머리칼을 라스타파리(rastafari)식으로 치장하고, 잃어버린 영역의 지도 제작에 골몰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여성 센터의 여성들과 함께 얼굴에 문신을 그리고 있었다. 이 문신은 패배한 여신들의 가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마우이는 죽음의 여신에게 패배하기 전에 많은 여신들을 물리치고, 이들을 모두 망각 속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불의 여신 마우이카(Mahuika)를 이글거리는 손톱으로 할퀴었고, 지식의 여신 무리랑가웨누아(Muriranga-whenua)를 비롯해서 차례차례 여신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해밀턴 시의 마오리 여성들은 패배한 여신들의 가면을 만들고 있었다. 이 여신들에게 새로운 육신을 부여하고 기억에 되살림으로써 비밀의 이쪽 편에 남게 하려는 것이었다.
지식의 단계에서 신화는 전설보다 훨씬 상위에 위치한다. 신화는 모두가 공유하는 심오한 앎을 이야기한다. 신화는 단지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감추어진 진실을 표현하며, 이는 제의를 통해서 주기적으로 재현된다. 따라서 가면을 복원하는 작업, 잃어버린 이야기를 되살리는 작업, 그리고 오랫동안 우리 여성들에게 금지된 언어를 되찾는 일은 신화에 등장하는 저 학살 이전에, 저 전쟁 이전에 가면을 관장한 여성들이 깨달은 그 무엇을 자각하는 일이기도 하다. 비록 지난한 작업이지만 오늘날 우리 여성들은 과거에 빼앗긴 고유의 가면이 가진 신성과 특성과 힘을 되찾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내가 ‘고유의 가면’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까닭은 누군가가 우리들에게 덧씌운 아주 위험한 가면이 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조속한 시일 내에 이러한 가면을 벗어던져야 가면을 자신의 얼굴로 착각하는 위험에서 탈피할 수 있다.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세계화라는 중립적인 가면도 여기에 속한다. 갖가지 형태로 위장한 세계화라는 가면은 상품을 가득 실은 거대한 컨테이너를 우리 항구로 실어오고 있으며, 여기에 ‘제1세계 생산품’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다. 그 생산품은 세계에서 가장 값싼 노동력으로 만든 것이다. 다시 데운 햄버거 냄새가 나기 때문에 생산자인 우리들은 과연 제1세계에서 만들었냐고 의심하며, 그런 상품은 우리들의 남성 신과 여성 신을 지워버리는 지우개라고 생각한다. 우리를 다르게 만드는 것은 제의의 차이인데도 낯선 소수가 이 모두를 동일한 실로 꼭두각시처럼 조종한다.
우리는 글쓰기를 통해서 막강한 탈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로보트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언어의 맛을 돌려주는 일이야말로 여성 글쓰기가 모국어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라고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에게 헌정한 책에서 말했다. 크리스테바는 여성 철학자 가운데서 아렌트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꼽을 수 없었다. 아렌트는 나치의 인종주의와 맞선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크리스테바는 아렌트의 책에서 학문 연구의 단초, 특히 사랑에 관한 연구의 단초를 얻었다. 또한 크리스테바는 아렌트의 문장을 꼼꼼하게 인용하면서 아렌트의 전기를 서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저서를 심오하게 분석하고 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만큼 확신에 찬 여성 아렌트는 ―아우스티누스에 관한 저술도 있다― 이야기 속에서, 그리고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여성은 오랫 동안 교육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글을 쓸 수도 없었고, 또 글을 쓰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어떤 주교는 여자 중에서도 제일 똑똑한 여자를 침묵시키기 위해 여자 가면을 썼다고 한다. 이처럼 원시시대와 마찬가지로 갖가지 책략을 동원하여 여성을 비밀로부터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넘어서는 동시에 여성에게도 호모 사피엔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라는 위상을 부여하는 비밀로부터― 격리시키려고 하였다. 이제는 여성도 글을 쓴다. 이것은 지식이자 놀이이자 정치이다. 여성은 이제 열정적으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영역의 지도를 작성하고 있다. 이 영역은 광석이 많이 매장된 곳이다. 왜냐하면 언어라는 것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이제 수호 가면을 되찾고 있다. 그리고 세상 어느 곳이나 빠짐없이 비추는 눈부신 비밀의 빛이 거대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