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문학

장송(葬送)

[책갈피] 2006. 2. 28. 13:18

장송(葬送)

 

1849년 10월 17일, 피아노 연주가이며 작곡가이고 죠르주 상드의 연인이었던 폴란드 태생의 음악가 ‘쇼팽’이 오랫동안 앓던 후두결핵으로 파리에서 죽었다.  그의 나이 39세. 하늘이 그의 재능을 시기해서 거둬간 것일까? 애석하게도 아직 죽기엔 이른 나이였다. 그의 장례식은 2주일후인 10월 30일에 발 디딜 틈이 없이 운집한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마들렌 사원’에서 그가 죽기 2년 전인 1847년에 작곡한 장송(葬送)행진곡을 시작으로 거행 되었다. 

 ※ 그러고보니 엊그제 3.1일이 쇼팽의 탄생일이다.

 

                  <쇼팽,  외젠 들라크루아作>          <녹색조끼를 입은 자화상,  외젠 들라크루아>

 

 <히라노 게이치로>의 『장송(葬送)』의 도입부는 쇼팽의 장례식 광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장례식장 앞에서 벌어진 군중들의 소란, 쇼팽의 죽음에 비통해하는 들라크루아를 비롯한 지인들의 심경 등이 장중하면서도 절제된 문장으로 그려진다.

『장송』은 프랑스 2월 혁명(1848년)을 전후한 정치적 격랑기의 파리를 무대로 섬세한 기품과 상냥함을 가진 병약한 천재로 ‘피아노 시인’이라 일컬어지는 <프레데리크 쇼팽>, 쇼팽의 친구이며 부단한 고뇌와 성실한 열정의 소유자로 ‘회화의 학살자’라 불리는 <외젠 들라크루아>를 양대 축으로 하여 문학가이면서 자유분방한 사고의 소유자로 천하 남성들의 연인이었던 <죠르주 상드>를 조연으로 등장시킨다.  그리고 이 들과 교제했던 수많은 예술가―이름만 들어도 금방 알 수 있는 음악가, 미술가, 문인 등―와 가족 등을 중심으로 이 들의 사랑과 고뇌, 삶과 죽음을 장려하게 그린 대작이다.

 

소설의 시간적 공간은 쇼팽이 연인 죠르주 상드와 함께 지내던 노앙을 떠나 파리로 돌아온 1846년 11월 12일부터 그가 죽음에 이르는 1849년 10월까지의 3년의 기간이다. 작가는 이 기간 동안 주인공과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현미경을 들이대듯 꼼꼼하게 묘사한다.

쇼팽-상드-들라크루아로 이어지는 소설의 줄거리는 의외로 단순하지만 글의 상당부분이 예술론을 피력하는 데에 할애되고 또 소설 속의 묘사는 상당히 섬세하고 치밀하여 이 작품을 1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책으로 만든다.  그래도 지루하거나 따분하다기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  예술과 창작에 관한 논의 뿐 아니라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에서도 등장 인물들은 단어의 본래 뜻과 상황이 내포하는 의미까지를 포함하여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말을 고른다. 그러면서도 언어의 부정확 혹은 불명확을 염려한다. 그러한 고민, 대화 중의 미묘한 심리 변화, 상대방의 표정이나 이해의 정도를 살피는 태도, 심지어 침묵의 소리와 의미까지 세밀하게 표현된 글을 읽고 있자면 마치 천천히 돌리는 비디오를 보는 듯하다. 모든 동작이 눈에 선하고, 그들 사이에 울리는 미세한 감정의 파장까지도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전해온다.

 

 

그 시대 고전주의의 엄격함에 대한 반발로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사조가 유행할 무렵, 낭만주의자로 대중에게 인식되고 있던 쇼팽과 들라크루아는 오히려 그러한 호칭에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그들은 단순히 ‘격렬한 영감’에 의해 즉물적으로 표현되는 ‘낭만주의적’인 작품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엇보다 예술의 ‘이상(理想)’을 추구하며, ‘천재(天才)’에 의해 한순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작품이 아니라 고상한 ‘취미’로 갈고 닦은 세련되고 완벽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자 한다. 고전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되 표현 방법에 있어서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근대적 기법을 추구한다는 것이 들라크루아가 생각하는 낭만주의의 본질이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  1830>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작가가 문학의 힘으로 다른 형태의 예술인 그림과 음악을 묘사하는 장면일 것이다.  첫 권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이 몇 년간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천장화를 바라보는 들라크루아의 시선을 빌려 하원 도서관 천장화 구석구석에 대해 치밀하게 묘사한다.  질서와 무질서의 대립이라는 주제에서 출발하여 「그리스에 문명을 전하는 오르페우스」와 「이탈리아를 유린하는 아틸라」를 통해 화가가 표현하고자 한 의미를 설명하고, 그림의 전체 모습을 부분으로 나눠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들라크루아가 자신이 정한 주제와 세계관을 그림으로 형상화했듯이, 작가는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언어로 형상화한다.  또, 둘째 권 첫머리에 쇼팽의 연주회 장면에 이르러서는 한 소절 한 소절 연주할 때마다 달라지는 쇼팽의 태도와 감정, 피아노의 선율을 타고 피어 오르는 정경, 청중의 반응, 연주회장의 뜨거운 열기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그야말로 예술에 대해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표현한 이 장면은, 언어의 근본적인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물음을 주기에 충분하다.

<키오스 섬의 학살,  외젠 들라크루아, 1824>

[들라크루아는 이 그림으로 '그로'로부터 "회화의 학살자"라는 (혹)평을 듣는다]

 

2005년 10월,  『장송』의 한국 출간을 계기로 방한한 <히라노 게이치로>는 인사동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서 묻자 "신이 없는 시대에 인간의 구원문제를 다루고자 했습니다. 일본이 메이지 시대 이후 유럽의 근대문명을 아무런 비판 없이 무조건 받아들여 현재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으며,  물질주의 만연, 허무주의, 도덕의 붕괴 등은 일본인들이 신을 믿지 않아 생긴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일본 도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묘사된 19세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분위기를 닮았다"고 말했다. 종교가 쇠퇴하고 돈만 있으면 뭣이든 된다고 여긴 19세기 유럽의 상황과 일본의 지금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는 또 "한 살 때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돌연사한 후 '죽음'의 문제는 제게 가장 큰 인생의 주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쇼팽이 조국 폴란드에서 망명해 파리에서 세상을 뜰 때까지 삶을 추적하면서 인간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소설에서 풀어보고자 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이 소설에서 음악가 쇼팽과 들라크루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데 대해  "폴란드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쇼팽의 행적을 따라가면 당시 유럽의 정황을 잘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며, 들라크루아는 쇼팽과 친분이 두터웠을 뿐 아니라 르네상스 이후 회화를 모더니즘으로 연결시킨 중요한 작가여서 함께 다뤘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소설을 쓰기 전부터 쇼팽의 전기와 들라크루아의 일기 등을 읽고 그들의 인생과 예술론에 크게 이끌렸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이 작품을 위해 1년 동안 소설의 무대가 되는 파리와 런던, 스코틀랜드 등을 직접 찾아다니며 책에 등장하는 작품들을 실제로 관람하고 자료를 수집했다고 한다.

  ※ 책의 말미에는 그가 참고한 30여 권의 참고문헌 목록이 첨부되어있다. 

작가의 이런 치밀함은 3년간의 집필과정을 거치며 결과적으로 이 작품을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을 넘어 쇼팽과 들라크루아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 섬세한 마음의 움직임까지 모두 담아낸 치밀하고 방대한 작품으로 완성시켰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는 이 책을 읽고 “너무 이른 나이에 너무 많은 걸 가진 작가, 한꺼번에 갑자기 타오르고 한순간 사그라지는 찰라적인 폭발같은 불길이 아니기를 바라며 앞으로 '천재작가' 히라노 게이치로에 의해 씌여 질 수많은 작품들을 기쁜 마음으로 기대해 본다”라고 했다.

2002년 이 작품을 발표했을 때, 그의 나이 불과 27세, 젊은 나이에 머나먼 이역(異域)을 무대로 이토록 방대한 작품을 치밀하게 그려낼 수 있다니, 그저 작가적 역량에 부러움을 느낄 뿐이다.


히라노 게이치로(平野啓一郞)

1975년 6월 22일 아이치 현 출생했다. 명문 교토 대학 법학부에 재학 중이던 1998년 문예지 『신조』에 투고한 소설 『일식』이 권두소설로 게재되고, 다음해 같은 작품으로 제120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다. 이는 당시 최연소 수상 기록이며, 또한 대학 재학생의 수상은 <무라카미 류> 이후 23년 만의 일이었다. 해박한 지식과 화려한 의고체 문장으로 중세 유럽의 한 수도사가 겪는 신비한 체험을 그린 이 작품은 <미시마 유키오>의 재래(再來)’라는 파격적인 평과 함께 일본 열도를 ‘히라노’ 열풍에 휩싸이게 하며 일본 내에서 40만부 이상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9년 메이지 시대를 무대로 젊은 시인의 탐미적인 환상을 그려낸 두번째 소설 『달』을 발표한 이후 매스컴과 문단에서 쏟아지는 주목과 찬사에도 불구하고 3년여 동안 침묵을 지키며 집필을 계속해, 2002년 19세기 중엽의 파리를 배경으로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삶을 그린 대작 『장송』을 완성한다.

같은 해 특유의 섬세하고도 날카로운 시각으로 현대사회의 문제점들을 바라본 산문집 『문명의 우울』을, 2003년에는 실험적인 형식의 단편 네 편을 수록한 『다카세가와』를, 그리고 2004년에는 전쟁, 가족, 죽음, 근대화, 테크놀로지 등 현대사회의 여러 테마를 아홉 편의 단편으로 그려낸 『방울져 떨어지는 시계들의 파문』을 잇달아 발표하며 왕성한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