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리나 강의 다리
드리나 강의 다리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 강의 다리』는 발칸 반도의 400년 역사를 가로지르는 대서사시로 작가에게 “조국의 역사와 관련된 인간의 운명과 인류의 문제를 철저히 파헤치는 서사적 필력”이라는 찬사를 안기며 196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이다.
다뉴브 강의 한 지류인 드리나 강에 세워진 다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다리가 세워진 1516년부터 1차 대전 당시 폭파될 때까지의 400여 년에 걸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먼저 이 작품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이 작품의 무대가 되고 있는 발칸반도의 보스니아의 역사를 알아보는 게 좋을 듯하다.
보스니아의 정확한 현재 이름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보스니아는 다른 발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숱한 고난을 치러왔다. 서로 언어와 문화, 종교가 다른 세 개의 종족이 섞여 살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이 지역이 외세의 침략을 받으며 동화와 분열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14세기말 보스니아를 포함한 발칸반도는 격랑에 휩싸인다. 오스만 투르크가 발칸반도로 세력을 뻗쳐오면서 잇단 전투 끝에 1463년 보스니아는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로 바뀌게 된다. 그 뒤 16∼17세기 보스니아는 유럽의 기독교 세력과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 세력이 부딪치는 최전방이 되었다. 400년 동안 이어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으며 보스니아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회교도로 개종했다. 1877∼78년 러시아-터키 전쟁 뒤 열렸던 베를린회의를 거쳐 보스니아의 통치권은 다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넘어갔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함에 따라 보스니아는 세르비아 왕국의 영토가 됐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발칸반도도 전쟁의 격랑에 휘말리게 된다. 나치 독일군이 세운 크로아티아 괴뢰정권은 1941년 보스니아를 합병한 뒤, 수천 명의 세르비아계 주민을 유대인, 집시들과 함께 강제수용소로 내몰았다. 1945년 보스니아는 반(反)나치 게릴라 투쟁을 이끌었던 ‘티토’군에 의해 해방을 맞았고 유고연방으로 출범한다.
1980년 티토 사망 이후 유고연방은 집단 지도체제로 개편되며, 민족분규를 겪게 된다. 특히 1989년 동유럽을 휩쓴 공산정권 붕괴의 소용돌이에서 연방을 이루었던 6개 공화국 중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차례로 독립하여 연방이 사실상 해체되었다.
보스니아는 보스니아 회교도 43%, 세르비아계 35%, 크로아티아계 18%로 구성된 다종족 사회다. 이런 인종적 복잡성이 보스니아를 오랜 내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20만명 이상의 희생자와 200만명 이상의 난민을 양산했다.
이 중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기인 16세기 초에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19세기 초가 이 작품의 역사적 배경이다. 또 지리적 배경은 드리나 강 중류에 있는 소도시 ‘비셰그라드’이며, 주인공은 이 마을에 있는 11개의 아치를 가진 강 위에 놓인 ‘다리’이다.
드리나 강은 사바 강을 거쳐 발칸의 7개국을 관통하는 다뉴브 강으로 흘러내린다. 강의 한편에는 터키계 이슬람 세력이, 그 반대편에는 그리스정교회 세력이 살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환경으로 드리나 강은 오랫동안 국경보다 더 두터운 단절의 벽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소설은 ‘소콜로비치’라는 10살의 어린 소년이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로 끌려가는 1516년에서 시작된다. 다른 기독교계 아이들과 함께 ‘세금 삼아’ 잡혀간 소콜로비치는 자라서 ‘메흐메드 파샤’란 이름으로 터키 황제의 사위이자 장군 겸 정치가로 성공한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의 고향과 동방을 잇는 다리를 건설하기로 한다. 건설 실무를 맡은 부하들의 전횡과 그에 저항하던 주민들의 희생 등의 우여곡절을 거치며 마침내 다리는 완공되지만, 메흐메드 파샤는 곧 반대파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이제 다리는 두 지역을 오고가는 여행자들과 정복자들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으며, 동시에 마을은 다리를 중심으로 확장되어 간다. 다리 중앙에는 테라스와 카피야(터키어로 ‘門’을 뜻함)가 있는데, 카피야가 곧 이 소설의 중앙무대이다. 사람들은 공공의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그곳에 모였고, 젊은이들은 노래와 농담을 위해 모여들었다. 큰 사건과 역사적 변화를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성명서와 공고들이 나붙었으며 처형당한 사람들의 머리를 말뚝에 꽂아 여기저기 매달기도 했다.
소설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다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200여 개의 에피소드― 다리를 세우면서 어린 쌍둥이 남매를 교각에 산 채로 파묻었다는 전설, 다리 이쪽과 저쪽에 사는, 종교가 다른 청년과 처녀가 사랑하지만 부모들이 반대하는 이야기, 청년과 처녀가 난간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 다리를 건너면 부모들도 승복해야 한다는 관습 등―로 구성되어 있다. 각 에피소드는 특정 주인공이 부각되는 대신, 11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다리’가 이야기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다리가 놓이면서 지리적·종교적으로 철저히 분리되어 있던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들도 서로 만나 교류하고 갈등하게 된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인종과 종교에 관계없이 우정을 나누는 사람들, 지배 세력의 횡포에 맞서는 민중, 종교 갈등의 광기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 민초들의 애절한 사연 등이 그야말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로써 드리나 강의 다리는 이질적인 문화들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지배 제국이 바뀔 때마다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희비가 엇갈리는 장소가 된다.
작가는 열한 살 때까지 ‘비셰그라드’에 있는 고모의 집에서 생활하며 드리나 강의 다리에 대한 전설을 들으며 자랐고 매일 같이 이 다리를 가로질러 학교를 다녔다. 그곳에서 들었던 전설과 사연들, 보았던 풍정과 사건들을 상상력의 다리(橋)로 연결해 만든 소설이 바로 이 작품이다.
안드리치는 이 소설을 통해 이민족 간의 갈등과 충돌을 수많은 주인공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그리면서도 화합과 영속성을 상징하는 다리를 내세워 모든 이질적인 민족과 종교·언어·문화가 만나서 화해하고 공존하기를 염원했다.
이 작품에서 다리는 끊임없이 변해가는 인간사를 지켜보는 증인이자 그와 대비되는 영속성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수많은 전쟁과 살육의 아픔 속에서도 유유히 흘러가는 드리나 강의 모습을 통하여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평화에 대한 갈망일 것이다.
<이보 안드리치 ( Ivo Andric )>
1892년 보스니아의 트라브니크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보스니아에서 보낸 안드리치는 자그레브와 비엔나에서 철학을 공부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함으로써 학업을 중단했다. 그 무렵 안드리치는 진보적 민족 단체 ‘청년 보스니아’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나 1914년 많은 단원들이 체포되고 안드리치도 3년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때 옥중에서 읽은 도스토예프스키, 키에르케고르는 훗날 그의 창작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11년에 시를 발표하며 창작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20년 첫 단편집 『알리야 제르젤레즈의 여행』을 비롯 보스니아의 여러 민족들의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소재로 사후까지 100여 편이 넘는 단편과 중·장편소설을 발표함으로써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작가가 되었다.
안드리치는 외교관으로 오래 일했다. 독일 베를린에서 유고슬라비아 대사로 일하다가 1941년 4월 베오그라드로 돌아왔는데 몇 시간 뒤 독일의 공습이 시작됐다. 그는 베오그라드를 장악한 독일군에 의해 가택 연금된 채 ‘보스니아 3부작’을 써서 4년 후 한꺼번에 발표했다. 그것이 바로 『드리나 강의 다리』, 『트라브니크의 연대기』, 『아가씨』이다.
이 작품들은 침체된 유고 문학계에 새로운 부흥을 가져오게 되며 특히 『드리나 강의 다리』는 안드리치가 1961년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발칸의 호메로스’로까지 불리우며 보스니아의 얼굴을 가장 잘 드러낸 작가로 꼽히는 안드리치는 1975년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