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눈 |
지난 5월24일부터 3일간의 일정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문학 행사인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이 “평화를 위한 글쓰기”라는 주제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이 포럼이 내 관심을 끈 이유는 포럼의 거창한 주제보다도 해외 초청 작가 중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 몇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1994년 『 万延元年のフットボ-ル (만연원년의 풋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 1988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 상’을 수상한『 紅高梁 (붉은 수수밭)』의 원작자로 알려진 중국의 <모옌(莫言 Moyan)>, <소잉카>, <고디머>, <쿳시> 등과 함께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작가로 『검은 은둔자』, 『강을 사이에 두고』 등을 쓴 케냐의 <응구기 와 시옹오>, 칠레 작가로 『연애소설 읽는 노인』,『감상적인 킬러의 고백』을 쓴 <루이스 세풀베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 『하얀성』, 『내 이름은 빨강』등을 쓴 터키의 <오르한 파묵>과 1963년 데뷔작인 『조서』로 ‘르노도 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현재 프랑스 문단의 살아있는 신화로 불리는 <르 클레지오>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 중에서 특히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르 클레지오>와 <오르한 파묵>이다. 그런 관계로 나는 이 두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는 거의 빠짐없이 찾아 읽고 있는 편이다.
그래서 오늘은 <오르한 파묵>과 그의 최신작인 『눈(원제 : Kar)』에 대해서 쓰고자 한다.
먼저 작가 <오르한 파묵>에 대해 알아보자면, 그는 1952년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이스탄불 대학에서 건축과 저널리즘을 공부했으며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첫 소설 『케브데트 씨와 그의 아들들』로 ‘오르한 케말 소설상’을 수상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여 두번째 소설 『고요한 집』으로 ‘마다라르 소설상’의 영예를 안게 된다. 1985년에 발표된 세번째 소설 『하얀 성』은 "동양에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뉴욕 타임즈)는 격찬을 받으며 그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며 이후 『혹서』, 『새로운 인생』, 『내 이름은 빨강』등 문제작을 잇달아 발표한다.
『새로운 인생』은 터키 출판사상 가장 많은 판매부수를 기록한 소설이며,『내 이름은 빨강』은 2002년 프랑스 '최우수 외국 문학상', 2003년 이탈리아 '그린차네 카보우르 상', 2003년 '인터내셔널 임팩 더블린 문학상' 등을 받았다.
오늘 이야기할 『눈』은 2002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2004년 뉴욕 타임스 가 선정한 ‘올해의 책’ 10권 중의 한 권으로 선정되었다.
보르헤스와 나보코프, 칼비노, 밀란 쿤데라, 움베르토 에코, 제임스 조이스, 프란츠 카프카, 윌리엄 포크너, 살만 루시디 등 기라성같은 작가들과 비교되면서 그는 세계 각국의 언론의 찬사를 받으며 현대 소설의 가장 독창적이고 전위적인 세계를 열어가고 있다는 평가받고 있다.
한국을 찾은 <파묵>은 기자들과 인터뷰에서 "작품은 현실을 반영하지만 작가는 현실주의자가 아닙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독창성은 전혀 다른 두 가지를 한 공간에 풀어놓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슬람 이야기를 보르헤스 식으로 쓰는 것입니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부터 이슬람 신비주의까지 다양한 사상의 영향을 받았습니다"고 했다.
<파묵>은 문화적으론 보수주의자지만 정치적으론 서구를 지향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중동문제에 대해 종교간 갈등으로 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항거하는 것일 뿐이란 주장이다. 종교가 반미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을 뿐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의 충돌이 본질은 아니라 한다.
<파묵>은 "세계적인 작가가 되려면 가장 인간적인 것을 써야한다"며 "소설은 가장 보편적인 종교, 소설의 독자는 같은 신을 섬기는 같은 신도"라고 말했다. 또 "이모부가 한국전쟁에 참전, 어려서부터 한국이야기를 들었으며, 외국인의 시선에 민감한 것을 보니 터키처럼 민족주의가 강한 것 같다며 눈부신 경제성장이 놀랍다"라는 말로 나름대로의 한국관을 피력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엔 시를 썼습니다. 시는 신이 시인의 입술을 빌려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신은 말이 없더군요. 그래서 `만약 신이 말을 걸어온다면` 상상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소설이 되었습니다"
터키정치를 비판한 작품으로 초현실적 요소
가 많은 것은 현실의 답답함을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작가는 말한다. 『눈』은 폭설
이 내린 터키 동북부 국경 지역의 카르스를
배경으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근대화론
자들 사이의 무력 충돌과 사랑을 다룬 소설
로 사흘 낮, 사흘 밤, 눈 속에 갇힌 카르스에
서 벌어진 일들을 그리고 있다. 정치사건에
얽혀 독일로 망명하여 4년 동안 시를 쓰지
못하고, 죽음처럼 방황하던 시인 ‘카(Ka)’는
어머니의 부음을 받고 12년 만에 고향 이스탄불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스탄불의 신문사에 있는 벗한테서 임시 기자로 취재에 나서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카르스에서 소녀들이 잇달아 목을 매 자살하고 있는 이유와 임박한 시장 선거를 취재해 달라는 것이다. 카가 이 요청에 응한 것은 사실 카르스에는 그의 옛사랑 이펙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는 마을 사람들과 경찰청장, 신문사 소장, 쿠르드인 교주, 이슬람 신학생, 지명수배된 테러리스트 등을 만난다.
옛사랑 이펙과의 재회 이후, 자신이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은 카의 눈 앞에서 한 여학생을 자살로 몰아넣은 교육원장이 살해된다. 이슬람 코란에는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는 히잡을 쓰라고 쓰여 있지만 서구식 근대화론자인 교육원장은 히잡을 쓰고 등교하는 여학생들에게 퇴학 조치를 내려 버렸다는 게 살해의 원인이다.
이 소식이 퍼져 나갈 무렵 시내의 극장에서 히잡 착용을 거부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상연하던 극단이 청중을 볼모로 근대화를 부르짖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망상에 빠진 저명한 연극배우 수나이 자임이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쿠르드인들을 쓸어버리려고 일으킨 이 군사 쿠데타는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카르스의 모두를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 격랑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 과정에 테러리스트 라지베르트와 정부 측 스파이 Z. 데미르콜, 경찰과 언론, 히잡을 쓴 소녀들의 리더이자 이펙의 여동생인 카디페가 끼어들어 소설은 한층 복잡하고 풍성한 결을 이룬다. 케말주의자도 이슬람 원리주의자도 아니고 카르스인도 아닌 무신론자 카는 국외자라는 그 이유 때문에 카르스에서의 쿠데타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에 개입하게 되고, 카의 사랑과 쿠데타, 카르스 모두의 행방은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이 책에서 작가는 서로 다른 문명 간의 갈등과 오늘날 터키가 안고 있는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딜레마들을 문학적으로 완벽하게 재구성하고 있다. 작가의 오랜 관심사였던 이슬람 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충동과 갈등이란 주제는 이 책에서 보다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 소설은 예술과 인생의 본질을 탐색하는 한 편의 완성도 높은 예술가소설이자 연애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