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문학

부서진 사월

[책갈피] 2005. 8. 10. 20:55
 

부서진 사월

 

 

 알바니아  북부 고원 지대에 남아 있는 관습법(카눈)의  전통을 소재로  인간 실존의  비극을 아름답고도 신비로운 분위기로 형상화한 『부서진 사월』은 <카다레>가  1980년에  발표한 소설로 유럽 전역에서 극찬을 받으며 영화화되기도 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의 중심 소재는 알바니아의 북부 고원 지대에 남아 있는 옛 관습법(카눈)의 전통이다. 카눈이란 무엇인가?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알바니아 고유의 관습법으로 피는 피로써 갚는다는 것이 주 내용이다.  어떤 이유로 한 가문의 누군가가 타 가문으로부터 살해당하면 그에 따라 복수가 시작된다. 상대 가문의 누구이든 죽여야만 하고 그리하여 피의 복수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소설 『부서진 사월』은 그 피의 복수라는 임무를 운명적으로 부여받은 주인공 그조르그에 의해 장엄하게 진행된다. 이십대의 청년 그조르그는 몇 날 밤을 매복한 끝에 마침내 원수의 가문의 한 명을 총을 쏘아 살해하게 되고 그의 임무는 마침내 완수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자신이 피의 복수(카눈)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소설은 죽을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그조르그의 한 달간의 긴장과 초조와 공포의 시간을 긴박하게 좇아간다. 그와 함께 관습법 학자 베시안과 그의 아내 디안, 카눈 해석가, 피〔血〕의 금을 거둬들이고 고원 지대에 관한 문서를 관리하는 일을 겸하는 오로쉬 성(城)의 기묘한 피 관리인 등이 등장하며 알바니아 북부 고원의 황량하고 음산한 풍경과 그 속에서 펼쳐지는 삶과 죽음의 처절하고 숨막히는 순간들이 이어진다.


[비와 안개에 싸인 알바니아 고원 지대에서 벌어지는 인간 실존의 비극적 서사시]


소설이 진행되는 사이사이 카눈에 따라 벌어진 여러 유명한 사건들이 제시된다. 사실 이것들은 관습법에 따른 사건들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예들이다. 카눈을 최대한 확대해서 보여주기 위한 예들을 총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읽는 독자가 보게 되는 것은 매우 집약되고 확대된 모습의 카눈이다. 카다레는 이를 통하여 우리 삶에 내재하는 근본적 부조리성과 비극을 매우 강렬하게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조르그는 '나는 자유로운가?' 하고 자문했지만 결국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 강력한 카눈의 힘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고 만다. 관습법과 복수에 대해 순전히 지적이고 과장된 시각과 긍지를 갖고 생명의 법칙보다 죽음의 법칙이 우선시되는 이 유령의 지대를 방문했던 베시안도 예외 없이 그 대가를 치른다. 돌발적인 숙명만 작동하면 누구든 반신의 존재, 영웅 혹은 희생제물이 될 수 있는 고원 지대의 삶과 카눈에 아름다우면서도 끔찍한 무엇인가가 있음을 감지하고 그 알 수 없는 매혹적인 힘에 동요된 아내가 갈수록 자신으로부터 멀어져가는 것이다. 고원 지대라는 죽음의 세계, 유령의 세계가 그에게서 아내를 앗아가버린 것이다. 그것은 어느 누구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에 근본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끔찍하고 피비린내 나지만 또한 아름답고 대단히 위대한 어떤 것의 개입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몇 세기 동안 이어져내려온 수백만의 영혼들의 비극과 결부된 끈질기고 모호한 그 무엇이기도 하다.


<카다레>는 『부서진 사월』 속에서 놀라운 신화적 상상력을 통하여 안개, 추위, 비와 구름의 세계 속에 신화적 알바니아, 영원한 알바니아의 모습을 구현해내고 있다. 영원한 알바니아가 호메로스 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아주 먼 시간 속에 그 뿌리를 담근 채 상기되는 것이다.


베사, 그자크스, 도레레스, 무란 등 카눈 관련 용어를 사용해가며 작가는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또는 서술을 통해 카눈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해주지만 작가가 카눈을 바라보는 입장이 부정적인지 긍정적인지는 알 수 없다. 해설가 유형의 인물인 학자 베시안의 입을 통해서는 카눈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피력하지만 다른 등장인물, 예를 들면 알리 비낙의 보좌관인 의사의 입을 통해서는 카눈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카다레>는 신화와 전설을 작품 속에서 다룰 때 일단 그것을 원용한 후 시간을 재편하고 왜곡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는 방식을 즐겨 사용한다. 그의 손을 통하여 일종의 가상의, 영원의 세계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작품 속에서 시간적, 공간적 배경 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모호하게 말하는‘ 수법을 이용한다. 이때 탄생되는 가상의, 영원의 세계는 가상이기는 하되 실제의 세계보다 더욱 진실된, 진실의 모습이 보다 확장되어 강렬하게 나타나는 세계다. 실제 역사에서 소재를 빌려온다 해도 몽환적인 우화의 형식을 통해 진실과 영원의 세계에, 신화와 상징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전제주의의 폐해를 고발하는 작품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