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문학

그림자 없는 사람들

[책갈피] 2009. 1. 1. 08:55

그림자 없는 사람들



보르헤스 소설의 난해함, 마르케스가 펼치는 마술적 리얼리즘, 칼비노의 소설 속에 나타나는 환상성, 그리고 카프카의 작품에 깔려있는 기괴함과 불안……   이런 요소들이 모여 소설을 구성한다면 어떤 내용의 소설이 탄생할까?  아마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야기로 시작되지 않을까?


어느 날, “내 영혼이 오그라든다”는 말을 남긴 채 그가 사라졌다.  늦은 저녁, 갑자기 살가죽이 몸을 감싸기에 턱없이 작아졌고, 손은 팔에, 발은 다리에 맞지 않게 된다.  눈도 정상을 벗어나 산 너머도 볼 수 있을 만큼 밝아졌고, 귀는 국자만큼 커져 궤짝과 삽자루, 질항아리와 빗자루 소리까지 들을 수 있게 된다.  매일 보는 사물이 뒤틀렸고, 모든 것이 갑자기 신음하며 울고 웃었다.  그의 영혼은 더욱 줄어들었고, 요리하는 아내와 세 아이, 그리고 자신의 모자를 남긴 채 그는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현대 터키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하산 알리 톱타시가 선보이는 독특한 미스터리『그림자 없는 사람들』은 평범한 시골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알 수 없는 '사라짐'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은 현실과 환상을 절묘하게 넘나드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시적인 텍스트에 잘 녹여내고 있는 수작으로 마을 사람들의 사라짐을 육체적인 소멸의 차원을 넘어 기억의 상실, 시공간의 뒤엉킴, 정신의 부재 등의 환상적 설정을 통해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삶의 불안과 존재론적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반복되는 생활이 주는 고통과 공포를 견뎌야 하는 현대인의 화두인 삶과 존재의 이유에 대한 형이상학적 고뇌를 잘 표현해내고 있다.


소설은 시간적 배경을 알 수 없는 이발소에서 시작된다.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와 교차로 등장하는 사건의 주 배경이 되는 어느 마을 이야기에서는 전지적 작가 관점이 배열되면서 처음부터 독자들을 미스터리로 몰아간다. 마을의 이발사 즌글 누리가 아내와 세 명의 자식들을 놔두고서 어느 날엔가 사라졌다. “영혼이 오그라든다”라는 실존 자체에 대한 질문처럼 보이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말이다.

 난생 처음 겪는 변화에 사람들은 당황해 한다. 누리가 마을 밖으로 떠났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이 마을 저 마을 떠도는 집시와 도붓장수, 우체부가 전하는 소문에 목을 매게 되고 온갖 불순한 풍문에 휩싸여 괴로워한다.

이에 읍장이 나서 대도시로 나가 상급관청에 실종신고도 하고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보지만 누리를 찾을 길이 없다. 그리고 이번에는 마을에서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처녀 귀베르진이 사라져 버린다. 사람들이 안정을 되찾아간다고 믿었던 읍장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유괴되었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채 돌아온 모습에 경악을 감추지 못한다. 그렇게 불안과 공포의 전염병은 마을을 점점 더 휘감게 된다.

 

 

계속해서 이야기는 이발소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이야기와 중첩이 되면서 점점 일상적인 스토리텔링에서 벗어나 독자들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다. 처음에 사라졌던 즌글 누리는 수년 만에 다시 마을에 나타나지만 소설에서 그의 존재감은 점점 희미해져만 간다. 그동안 그가 어디에서 무얼 했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중앙정부로부터 소외된 마을에서는 인간 군상들의 비루한 모습들이 여과 없이 드러나게 되고, 이성적 판단보다는 주술적인 이슬람의 종교지도자 이맘에 의지하는 마을 사람들의 연약함이 적나라하게 파헤쳐진다.


누군가는 기억을 잃어버리고, 누군가는 여러 장소에 동시에 출몰하며, 누군가는 두 얼굴을 지니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 작가는 이러한 설정을 통해 사람들의 일상적으로 느끼는 삶의 불안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마을 사람들은 점점 깨닫는다. 단지 그들의 신체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누군가의 기억도 사라진다. 기억을 잃어버린 것인지 사라진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존재감도 사라진다.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존재감이 한없이 가볍다는 사실에 불안해하는 사람들,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에 고민하다 그 답을 찾지 못해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왜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그 질문은 질문하는 것과 동시에 사라지고 만다. 그런 불안함은 모르고 있을 뿐이지, 아니 외면하고 있을 뿐이지, '누구나'의 마음 속에 있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교양 있는 대도시 중산층만이 자기 정체성과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면서 형이상학적인 한계에 부딪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한갓 시골 범부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삶의 이유와 존재에 대해 고민한다는 사실을 대단히 인상적으로 보여주면서, 똑같은 생활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통과 공포를 견뎌야 하는 현대인의 삶을 소박하게 위로한다.

 

하산 알리 톱타시[Hasan Ali Toptas]

1958년 터키 아나톨리아의 소도시 바클란 출생했다. 장거리 화물차 운전수로 떠돌이 인생을 살았던 아버지 탓에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손에 길러진 그는 신문도 책도 흔치 않은 척박한 소도시에서 자라 문화적 수혜를 누리지 못했지만, 마을에서 유일하게 그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던 도서관에서 보르헤스, 카프카 같은 유럽 대문호들을 만나면서 소설가의 꿈을 키우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세무서에서 일하면서 밤에 시와 소설을 쓰는 생활을 한다. 1987년, 서른의 나이로 늦깎이 데뷔를 하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고, 이후로 근근이 소설을 발표하며 작가 생활을 연명한다. 그러다 1995년 발표한 장편소설 『그림자 없는 사람들』로 문단의 찬사를 받으며 화려하게 재조명받게 되고, 이후 ‘유누스 나디상’과 ‘오르한 케말상’ 등 숱한 터키의 문학상을 수상하며 현대 터키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떠오르게 된다.

주요 작품으로, 『고독』, 『죽은 시간의 여행자』, 『잃어버린 꿈에 관한 책』, 『천 개의 우울한 즐거움』 등이 있으며, 지금까지 시집 한 권과 어린이책 한 권, 단편소설집 세 권, 장편소설 네 권을 펴냈다. 2005년 세무 공무원을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집필활동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