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진황축객서[上秦皇逐客書]
上秦皇逐客書
李斯(이사)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고소영 인사, 강부자 내각 등으로 표현되는 인재 등용방식에 대해 말들이 많다.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데도 자기 사람만을 고집하는 이대통령에 대해 아쉬움이 크지만, 이 자리가 정치 이야기를 하자는 건 아니니까 이쯤에서 그만 두기로 하고, 진(秦)나라 때 이사가 시황에게 올린 간축객서(諫逐客書)를 통해 인재등용 방식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이사(?~BC 208)는 초(楚) 상채(上蔡, 지금의 하남성 상채) 출신으로, 후에 진(秦)나라의 명재상이 되어 진시황을 도와 육국(六國)을 통일하였다.
이사는 젊은 시절에 일찍이 지방 향리에서 문서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였다. 어느 날 그는 관청 화장실에서 쥐가 인분을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심히 보고 있는데, 화장실의 쥐는 인간이나 개의 낌새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언제나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런데 한 번은 곳간에 들어갔더니 그곳에 있던 쥐는 곡식을 먹고 있었다. 게다가 훌륭한 건물 속에서 인간이나 개가 와도 아무런 걱정 없이 유유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상황을 본 이사는 사람도 때를 잘못 만나면 환경의 영향을 받아 화장실 앞의 쥐처럼 될 것이라 한탄하였다.
그 길로 이사는 관직을 버리고 당시 최고의 유학자 순자(荀子)를 사사하여 제왕(帝王)의 도를 배웠다. 후에 법가이론을 집대성한 한비자(韓非子)도 이때 이사와 함께 순자의 문하에 있었다. 장기간의 학습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순자의 인의설(仁義說)에 회의를 품고 순자에게, "진나라는 4대에 걸쳐 끊임없이 승리를 거두고 군대가 천하에서 강해져 제후들에게 그 위엄을 행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결코 인의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형세에 따라 취한 책략 때문입니다."라고 따졌다. 이에 순자는 그에게 너는 그것을 "근본에서 구하지 않고 말엽적인 것에서 구하는구나"라고 대답하였다. 이러한 순자의 비판에도 그는 여전히 진나라를 동경하여 그곳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 싶었다. 그는 순자 밑에서 학업을 끝낸 후 순자에게 하직인사를 하러 갔다
"지금 진나라 왕은 천하를 모두 삼키고 제왕이 되고자 하는데, 이때가 바로 선비가 유세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슬픈 것은 낮은 신분에 있으면서 변화를 꾀할 길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서쪽으로 가서 진왕을 설득해 보려고 합니다."
진 장양왕(莊襄王) 3년(BC 247), 이사가 진나라에 도착했을 때 바로 장양왕은 죽고 13세의 어린 왕 정(政, 후세의 진시황)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국가의 대권은 모두 승상인 여불위(呂不韋)의 수중에 있었다. 이사는 먼저 여불위의 식객으로 들어가 때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이사는 점점 여불위의 신임을 얻으면서 그의 측근이 되었으며, 그러한 이사의 재능을 미리 간파한 여불위는 이사를 진왕 정의 시종(侍從)인 낭관(郞官)으로 천거하였다. 수년 후 청년이 된 진왕 정은 여불위의 손에서 벗어나 친정을 펴면서 천하를 평정할 야심을 품고 있었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던 이사는 기회를 잡아 진왕 정에게 이렇게 제후들의 힘이 미약하고 진나라가 강성할 때에 신속히 제후들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할 것을 권하였다. 이에 진왕 정은 이사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를 장리(長吏)에 임명하였다.
이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육국을 붕괴시키기 위한 모략을 짜내었다. 즉 각 나라로 모사(謀士)를 파견하여 그 나라의 중신들 중에서 돈으로 매수할 수 있는 자에게는 뇌물을 쓰고, 협조를 거부하는 자는 몰래 처치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 군신간의 관계를 이간질 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실례를 들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후승(后勝)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는데, 그는 진나라로부터 비밀리에 많은 뇌물을 받았다. 그는 진나라를 탐지해 오라고 많은 첩자들을 보냈다. 기다리고 있던 진나라는 그들에게 더 많은 금품을 주어 그들을 모두 이중 첩자로 만들어 제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들은 제나라 왕에게 합종(合縱)으로부터의 탈퇴, 전쟁 준비의 중지, 5개국 원조의 정지를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진나라는 5개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다. 5개국이 멸망하여 진나라 군대가 제나라의 수도 임치(臨淄)를 공격했을 때 제나라의 백성들은 단 한 사람도 침입자에게 대항하는 자가 없었다. 이런 교란전술은 법가정치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수법으로 진나라는 이 방법으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제국의 위업을 달성했던 것이다. 진나라가 겨우 9년 만에 다른 6개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은 막강한 군사력의 우위 외에도 상대국의 체제를 내부로부터 붕괴시켜 버린 이러한 첩보 활동의 성공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사는 이 공적에 의하여 얼마 후에는 객경(客卿, 타국 출신의 대신)으로 승진되었다.
진왕 정 10년(BC 237), 이웃의 한(韓)나라 출신으로 진나라에 벼슬하고 있던 정국(鄭國)이라는 기술자가 진왕 정에게 관개수로를 만들기를 권했는데, 진왕 정은 그 의견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진나라 경내를 관통하고 있던 경수(涇水)와 위수(渭水)에 대대적인 관개 공사를 하도록 지시했다. 훗날 이 공사는 진나라의 국력을 소비시키려는 한나라의 모략임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러자 진나라의 왕족과 대신들은 전부터 타국인들이 중용되는 것에 불만이 많았던 터라, 이 사건을 계기로 그들의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게 되었다. 진왕 정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인지라 급기야 진나라에서 봉록을 받고 있는 타국인들을 모두 추방해야 한다는 "축객령(逐客令)"을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이사도 당연히 추방의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그는 이 축객령에 반발하여 진왕 정에게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이사의 명문 ‘간축객서(諫逐客書: 타국 출신의 축출에 대한 간언)’이다.
이사의 이 상소로 그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진왕 정은 축객령을 철회하고 그를 정위(廷尉)로 임명했다. 이것은 승상, 어사, 대부와 동렬의 지위에 이르는 것이다. 이때 이사에게는 또 다른 위기가 닥쳐왔다. 그것은 일찍이 순자 밑에서 동문수학한 한비자가 진나라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진나라가 한나라를 쉴 새 없이 공격하자 한나라에서는 화의를 청하기 위해 한비자를 사신으로 파견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자기보다 한비자의 학문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이사는 만약 한비자가 진왕 정에 의해 발탁된다면 자신의 입지가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의 동료인 요가(姚賈)라는 자와 함께 담합하여 진왕 정에게 이렇게 고했다.
"한비는 뭐니뭐니 해도 한나라의 공자입니다. 진나라가 제후를 병탄하려고 하는 지금 그 친구는 한나라를 생각하여 진나라를 위해서는 진력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랜 세월을 진나라에 두었다가 그대로 돌려보낸다면 장래의 화근이 될 것입니다. 이 기회에 법에 의하여 엄벌에 처해야 할 것입니다."
진왕 정은 이 말에 동요가 되어 한비자를 옥에 가두자 이사는 시간을 주지 않고 옥중에 독약을 보내 자살을 강요했다. 한비자는 진왕을 만나 변명하려고 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그 직후 진왕은 마음이 변하여 한비자를 사면하려고 옥중에 사람을 보냈으나 때는 이미 늦어 한비자의 목숨이 끊긴 후였다. 때는 BC 233년(진왕 정 14년)의 일이었다.
BC 221년, 진왕 정을 보좌하여 천하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이사는 통일제국에 각종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여 모든 권력을 시황제 한 사람의 손으로 집중시켰다.
또한 군현제를 실시하고, 법령을 새로 개정하였으며,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하였다.
만년의 시황제는 불로장생에 몰두하여 방사(方士)들을 가까이 했다. 방사란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영약이나 점복을 생업으로 삼는 무리들이다. 그들은 갖은 감언이설로써 시황제의 비위를 맞추다가 일이 잘 안되면 죽음을 면하기 위하여 도망을 갔다. 즉 시황제를 위해 불로장생의 영약을 지어주겠다는 명목으로 엄청난 금품을 하사받고는 나중에 후환이 두려워 도망쳐 버렸던 것이다. BC 212년, 마침 시황제가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있던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이라는 두 방사도 갑자기 모습을 감추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시황제는 크게 노하여 전국의 책들을 수집하여 불사르고 학자 460여명을 체포하여 함양에서 생매장을 하였으니, 그것이 유명한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이다. 이 부분에서 이사가 직접 개입한 부분은 기록에 보이지 않지만 당시 승상의 지위에 있던 이사가 그 일의 집행을 맡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BC 210(시황제 37년), 시황제는 아들 호해(胡亥), 이사, 조고 등과 함께 다섯 번째 순행을 하다 병을 얻어 사구(沙丘, 지금의 하북성 平鄕 동북)에서 향년 50세로 죽었다. 시황제는 죽기 전에 환관 조고를 불러 장자 부소(扶蘇) 앞으로 편지를 쓰게 했다. "군(軍)은 몽염에게 맡기고 함양에 돌아와 내 유해를 맞이하고 장례를 치루라"는 내용이었다. 부소는 2년 전의 갱유 사건 때에 시황제에게 그것의 부당함을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서북방군 사령관인 몽염의 감독관이라는 명목으로 북쪽 변방으로 추방되어 있었다. 시황제는 자신의 장자 부소에게 후사를 맡기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은 시황제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시황제가 죽자 환관 조고는 자기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먼저 호해를 설득하여 제위를 계승하게 한 다음 다시 이사를 포섭하였다. 일단 그들은 시황제의 죽음을 숨기고 순행을 계속하여 수도 함양에 돌아온 뒤에야 비로소 시황제의 죽음을 공포하였다. 그리고는 부소(扶蘇)에게 "함양으로 돌아와서 장례를 치루라"는 시황제의 유서를 "부소는 불효하니 자살하라"는 내용으로 고쳤다. 이것을 진짜로 믿은 부소가 자살하고, 둘째 호해가 제위에 올라 진이세(秦二歲)가 되었다. 조고는 낭중관(비서실장)의 요직에 취임했고 이세황제의 신임을 일신에 모아 국정을 맡아보게 되었다.
조고는 이세황제를 농락하여 점차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세황제가 즉위한지 채 1년도 되기 전에 가렴주구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각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잇따른 반란으로 정세의 급변을 우려한 이사는 이세황제를 알현하길 원했지만 그것은 조고의 저지로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누차 상소를 올려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사는 최후로 조고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리게 되었지만, 이세황제는 조고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있었던 터라 이사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그를 의심하게 되었다. 결국 이사는 모반의 혐의로 체포되어 일족이 모두 함께 투옥되었다.
그리하여 BC 208년7월(이세황제 2년) 진나라 최대의 공신이었던 이사는 함양의 거리에서 자신이 제정한 법령에 의해 허리를 잘리는 형벌을 받고 죽었다. 이사가 죽은지 1년 후에 진나라도 망했다.
평생 거짓을 지휘하여 사람을 죽이고 나라를 무너뜨렸던 이사였지만, 그가 주장하는 인재등용 방식인 ‘다양성과 개방성, 그리고 포용력’은 20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간축객서(諫逐客書)
臣聞吏議逐客,竊以為過矣.
昔穆公求士,西取由余於戎,東得百里奚於宛,迎蹇叔於宋,求丕豹,公孫支於晉.
此五子者,不產於秦,而穆公用之,井國二十,遂霸西戎.
신문리의축객,절이위과의.
석목공구사,서취유여어융,동득백리해어완,영건숙어송,구비표,공손지어진.
차오자자,불산어진,이목공용지,정국이십,수패서융.
신이 듣기에 대신들이 타국 출신의 관리들을 쫓아내기로 했다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잘못된 일입니다.
옛날 목공(穆公)은 현사들을 맞아들였는데, 서쪽으로는 융(戎)에서 유여(由余)를 얻었고, 동쪽으로는 완(宛)에서 백리해(百里奚)를 얻었으며, 송(宋)에서는 건숙(蹇叔)을 맞이했고, 진(晋)에서는 비표(丕豹)와 공손지(公孫支)를 찾았습니다. 이 다섯 명은 진 출신이 아니나, 목공은 그들을 임용하여 20개 나라를 병합하고 서융(西戎)의 패주가 되었습니다.
孝公用商鞅之法,移風易俗,民以殷盛,國以富彊,百姓樂用,
諸侯親服獲楚,魏之師,舉地千里,至今治強.
효공용상앙지법,이풍역속,민이은성,국이부강,백성락용,
제후친복획초,위지사,거지천리,지금치강.
효공(孝公)은 상앙(商鞅)의 법을 써서 낡은 풍속을 바꾸자 백성들이 풍성해졌고, 나라가 부강해졌으며, 백성들은 국가의 부름을 기뻐했고,
제후국들은 복종했으며, 초(楚)와 위(魏)를 무찔러 영토가 천리에 이르러 오늘에 이르기까지 잘 다스리고 있습니다.
惠王用張儀之計,拔三川地, 西井巴蜀,北收上郡,南取漢中, 包九夷,制鄢郢
東據成皋之險,割膏腴之壤,遂散六國之從 使之西面事秦,功施到今.
혜왕용장의지계,발삼천지, 서정파촉,북수상군,남취한중, 포구이,제언영,
동거성고지험,할고유지양,수산육국지종,사지서면사진, 공시도금.
혜왕(惠王)은 장의(張儀)의 계책을 써서 삼천(三川) 땅을 취했고, 서쪽으로는 파촉(巴蜀)을 병합했으며, 북으로는 상군(上郡)을 거둬들였고, 남으로는 한중(漢中)을 얻었고, 많은 이민족 땅을 포용했으며, 초(楚)의 언(鄢) 과 영(郢) 땅을 다스렸으며, 동으로는 성고(成皋)의 험난한 곳을 점령하여 기름진 땅을 빼앗았고, 6국의 합종책을 깨뜨려 그들이 서쪽의 진(秦)을 섬기도록 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昭王得范雎,廢穰侯,逐華陽,強公室,杜私門,蠶食諸侯,使秦成帝業。
此四君者,皆以客之功. 由此觀之,客何負於秦哉!
向使四君卻客而不內,疏士而不與,是使國無富利之實,而秦無強大之名也.
소왕득범저,폐양후,축화양,강공실,두사문,잠식제후,사진성제업。
차사군자,개이객지공. 유차관지,객하부어진재!
향사사군각객이부내,소사이불여,시사국무부리지실,이진무강대지명야.
또 소왕(昭王)은 범저(范雎)를 얻고 나서 양후(穰侯)를 폐하고 화양군(華陽君)을 쫓아내 왕조를 강화하고 권신의 세력을 억제했으며, 제후국들을 점령하였는데, 이로써 진은 제왕의 위업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 네 분의 군주는 모두 타국 출신 관리들을 중용하여 공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객이 어찌 진에 부담이 되겠습니까. 만일 네 분의 군주께서 타국 출신의 관리들을 거절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현자들을 멀리 하여 함께 하지 않았다면, 나라가 부강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진(秦) 역시 강대한 이름을 떨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今陛下致昆山之玉, 有隨和之寶, 垂明月之珠, 服太阿之劍, 乘纖離之馬,
建翠鳳之旗, 樹靈鼉之鼓. 此數寶者, 秦不生一焉, 而陛下說之, 何也?
금폐하치곤산지옥, 유수화지보, 수명월지주, 복태아지검, 승섬리지마,
건취봉지기, 수령타지고. 차수보자, 진불생일언, 이폐하설지, 하야?
현재 폐하께서는 곤산옥(昆山玉)을 얻으셨고, 수후주(隨侯珠)와 화씨벽(和氏璧)이 있으며, 명월주(明月珠)를 드리우셨고, 태아검(太阿劍)을 차셨으며, 섬리마(纖離馬)를 타시고, 취봉기(翠鳳旗)를 세우셨으며, 영타고(靈鼉鼓)를 설치하셨습니다. 이 여러 가지 보물들 가운데 진에서 난 것은 하나도 없지만, 폐하께서는 그것들을 좋아하는데, 어째서 그렇습니까?
必秦國之所生然後可, 則是夜光之璧 不飾朝廷, 犀象之器 不為玩好, 鄭衛之女
不充後官, 而駿馬駃騠 不實外廄, 江南金錫 不為用, 西蜀丹青 不為采.
필진국지소생연후가, 칙시야광지벽 불식조정, 서상지기 불위완호, 정위지녀
불충후관, 이준마결제 불실외구, 강남금석 불위용, 서촉단청 불위채.
반드시 진국(秦國)에서 난 것만 쓴다면, 야광주(夜光珠)는 조정을 장식할 수 없고, 서각(犀角)과 상아(象牙)는 가지고 노닐 수 없고, 정위(鄭衛)의 미녀들은 후궁으로 삼을 수 없고, 준마(駿馬)와 버새(駃騠)는 밖의 마구간을 채울 수 없고, 강남(江南)의 금석(金錫)은 쓸 수 없고, 서촉(西蜀)의 단청(丹青)으로는 채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所以飾後官,充下陳,娛心意,說耳目者,必出於秦然後可,則是宛珠之簪,
傅璣之珥,阿縞之衣, 錦繡之飾,不進於前, 而隨俗雅化,佳冶窈窕 趙女不立於側也.
소이식후관,충하진,오심의,열이목자,필출어진연후가,칙시완주지잠,
부기지이,아호지의, 금수지식,부진어전, 이수속아화,가야요조,조녀불립어측야.
또한 후궁을 치장하고, 시녀들을 꾸미며, 마음을 즐겁게 하고, 귀와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진(秦)에서 나온 것이라야만 한다면, 구슬로 꾸민 비녀나, 갖가지 모양의 구슬이 달린 귀걸이, 동아(東阿)의 흰 비단으로 만든 옷,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장식물 등은 폐하께 진헌할 수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풍속에 따라 우아하고 아름답게 꾸민 조신한 조나라의 여자들도 폐하 곁에 없었을 것입니다.
夫擊甕叩缶,彈箏搏髀,而歌呼嗚嗚快耳者,真秦之聲也.
부격옹고부,탄쟁박비,이가호오오쾌이자,진진지성야.
질항아리를 치며 질그릇을 두드리고, 거문고를 타면서 넓적다리를 때려 장단 맞추면서 시끄럽게 노래 부르고 즐기는 것이 진짜 진나라의 음악입니다.
鄭衛桑間,韶虞武象者,異國之樂也. 今棄擊甕而就鄭衛,退彈箏而取韶虞,
若是者何也? 快意當前,適觀而已矣.
정위상간,소우무상자,이국지악야. 금기격옹이취정위,퇴탄쟁이취소우,
약시자하야? 쾌의당전,적관이이의.
정(鄭), 위(衛), 상간(桑間: 河南省 濮陽縣), 소우(韶虞), 무상(武象)의 음악은 다른 나라의 음악입니다. 오늘날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는 음악을 버리고 정위(鄭衛)의 음악을 취했고, 거문고 타는 것을 버리고 소우의 아악을 취했는데, 이는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들 중 보기 좋은 것들을 골랐을 따름입니다.
今取人則不然,不問可否,不論曲直,非秦者去,為客者逐,然則是所
重者在乎色樂珠玉,而所輕者在乎人民也. 此非所以跨海內,致諸侯之術也.
금취인칙불연,불문가부,부론곡직,비진자거,위객자축,연칙시소
중자재호색악주옥,이소경자재호인민야. 차비소이과해내,치제후지술야.
현재 사람을 쓰는 것은 이렇지 않습니다. 가부를 묻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며 진나라 출신이 아니라고 쫓아 보낸다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여색, 음악, 구슬과 옥 등이요, 가벼이 여기는 것은 백성일 따름입니다.
이는 나라를 초월한 제후들의 술책이 아닙니다.
臣聞地廣者粟多,國大者人眾,兵強者士勇. 是以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故能就其深.
신문지광자속다, 국대자인중,병강자사용. 시이태산불양토양,
고능성기대, 하해불택세류, 고능취기심.
신이 듣기에 땅이 넓다는 것은 곡식이 많은 것이고, 나라가 크다는 것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며, 군대가 강하다는 것은 병사가 용감하다는 것입니다. 태산은 한 줌 흙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높을 수 있었고, 강과 바다는 작은 물길도 가리지 않았기에 그 깊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王者不卻眾庶,故能明其德。是以地無四,方民無異國,四時充美,鬼神降福。
此五帝,三王之所以無敵也. 今乃棄黔首以資敵國,卻賓客以業諸侯,
使天下之士退而不敢西向,裹足不入秦,此所謂『藉寇兵而齎盜糧』者也.
왕자불각중서, 고능명기덕。 시이지무사,방민무이국,사시충미,귀신강복。
차오제,삼왕지소이무적야. 금내기검수이자적국,각빈객이업제후,
사천하지사퇴이불감서향,과족불입진,차소위 『자구병이재도량』자야.
왕은 백성들을 버리지 않아야 그 덕을 밝힐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에는 사방의 구별이 없으며, 백성에게는 남의 나라라는 것이 없고, 네 계절은 모두 아름다우니 귀신이 복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왕오제(三王五帝)에게 적이 없다는 이유입니다.. 이제 백성을 버리는 것은 적국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고, 타국 출신 관리들을 버리는 것은 다른 나라가 위업을 달성토록 하는 것이며, 천하의 현사들을 쫓아내 서쪽으로 향하는 발길을 멈추고 감히 진국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도적에게 병사를 주는 꼴이고, 도적에게 양식을 가져다주는 것과 같습니다.
夫物不產於秦,可寶者多. 士不產於秦,而願忠者眾.
今逐客以資敵國,損民以益讎,內自虛而外樹怨於諸侯. 求國無危,不可得也.
부물불산어진,가보자다. 사불산어진,이원충자중.
금축객이자적국,손민이익수, 내자허이외수원어제후. 구국무위,불가득야.
물품이 진나라에서 나지 않아도 보물은 많으며, 현사가 진나라 출신은 아니지만 충성을 받치려는 자는 수 없이 많습니다. 이제 타국 출신 관리들을 쫓아 보냄으로써 적국을 풍성하게 하고, 백성을 잃어 원수를 유익하게 하면 안으로는 스스로가 약해지고 밖으로는 제후국을 원수로 만드는 일입니다. 나라에 위험이 없게 하려면, 취할 바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