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 문 학

밤은 노래한다

[책갈피] 2008. 11. 14. 18:48

밤은 노래한다



<김연수>작가의 장편소설 『밤은 노래한다』는 1930년대 초반 북간도의 조선인 사회를 뒤흔들었던 이름조차 생소한 '민생단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가슴 뜨거웠던 어떤 젊은이들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 그 운명은 민족해방과 사회적 평등이라는 숭고한 꿈을 품은 채 일신의 안위를 포기하고 혁명에 투신했던 젊은이들이 종국에는 서로를 의심하고 배신하고 죽이게 되는 가혹한 운명이다.  우선 이 소설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이 되는 ‘민생단 사건’의 전모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32년 3월, 일제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수립되자, 동만주의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은 연합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에 日帝는 '간도(間島)에서의 조선인 자치'를 슬로건으로 내세워 한·중 민족을 분열시키고 항일유격대를 무력화시키려 했다. 그리고 이를 실행할 기관으로 1932년 2월, 친일파인 경성 매일신보 부사장인 박석윤을 내세워 ‘민생단’을 조직했다. 민생단은 비록 5개월 만에 해체되었지만 민생단의 스파이들이 항일세력 내에서 '간도 자치'를 내세우며 분열공작을 획책한 결과, 항일 유격근거지 내에서 조선인이면 일단 민생단의 스파이라고 한번쯤 혐의를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친일주구 김동한을 중심으로 1934년 9월 간도협조회(間島協助會)가 결성되었다. 간도협조회의 분열공작에 대해 당시 항일유격대세력들은 민생단 스파이를 색출하기 위한 반민생단 투쟁을 전개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위원회와 항일유격대의 지도직을 차지한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민족배타주의에 빠져 한국인 항일투사의 대부분을 민생단으로 간주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파벌에 물든 일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도 자신에 가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민생단의 감투를 씌워 탄압하므로써 반민생단투쟁은 동만주일대 공산주의운동과 항일무장투쟁에 커다란 혼란과 위기를 가져왔다. 1933년부터 36년까지 자그마치 500여 명의 한국인 항일운동가들이 민생단이란 이름 하에 체포·살해되거나 도망가야 했으며, 많은 하부조직들이 마비상태에 빠졌으며, 한국·중국 간의 민족 갈등을 첨예화시켰다. 


『밤은 노래한다』는 일제강점기 저마다의 사연과 핏빛 서러움을 간직한 이들이 몰려든 북간도 땅을 배경으로 독립운동이라는 공통의 꿈을 가졌지만 현실과 부딪치면서 서로 갈등하게 되는 네 명의 젊은이들인 박도만, 최도식, 안세훈, 박길룡과 그들의 친구인 이정희라는 신여성, 그리고 이정희를 사랑했던 김해연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한일합방 당시 태어나 일본 고등공업학교를 다녔고 만주에 이주하여 만철(滿洲鐵道)의 측량기사로 일하고 있는 김해연은 ‘독립이니 해방이니 하는 말들’보다는 ‘총독부냐, 만철이냐, 광산이냐 하는 진로문제’를 더 중요시 했던 청년이다.  그런 그가 여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며, 책을 많이 좋아하던, 누구보다 정숙했던 여성인 이정희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이정희는 열혈 공산주의자이자 중국공산당의 프락치로 활동하며 혁명을 꿈꾸는 여성이다.  일본군 장교에 접근해 토벌대 정보를 조직에 보고하던 그녀는 정체가 발각되자 김해연에게 어서 피하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던 해연은, 누군가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그가 이정희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해연에게 정희를 소개해 준 박길룡이 사실은 정희의 애인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이정희가 자신을 이용한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해연은 지금까지 생각했던 세상이 '완벽하게 가짜인 세계'라는 점을 깨달으며 절망에 빠진다.


이 충격으로 아편에 빠져들다가는 자살을 시도하는 등 한동안 자신을 내팽개쳤던 해연은 여기저기 떠돌다 유격 근거지에 남게 되고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며 '피로 쓴 역사'에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정희가 학생 시절 함께 비밀 조직활동을 했던, 박길룡을 포함한 네 남자의 이야기가 드러난다. 하나같이 정희를 사랑했던 그 남자들은 연정과 질투가 혁명을 향한 노선 다툼과 구분할 수 없도록 뒤얽힌 가운데 서로에게 차례로 죽임을 당한다.

 


이 소설은 참혹한 역사적 사실과 고통스러운 질문을 이야기 속에 꾹꾹 눌러 담으며 독자들을 강력한 흡인력으로 빨아들인다. 서로가 손가락으로 같은 것을 가리키는 듯했으나 고개를 트는 방향이 달라 서로를 죽음으로 내몰아야 했던 네 명의 이야기를 되새김질하는 김해연은 '세계가 가짜일 때, 그리고 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반쯤 죽어 있을 때, 폭력만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유토피아란 폭력을 은폐하려는 자들의 거짓 관념에 불과하다'며 극단으로 치닫는다.

핏빛 근현대사를 바탕으로 하지만 소설이 마냥 무거운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역사소설이라기보다는 격랑의 시대에 휩쓸린 젊은이가 사랑과 배신, 고통, 죽음 등을 통해 삶과 세계의 이면에 눈떠가는 성장기이면서, 또한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청춘의 연애기에 가깝다.

책의 말미에는 작가가 소설을 구상하는 데 영향을 주기도 했던 민생단 관련 논문을 쓴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해제를 실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김연수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장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나섰다. 대표작에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굳빠이 이상』,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사랑이라니, 선영아』,『나는 유령작가입니다』등이 있다. 1994년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했고, 2001년 『굳빠이 이상』으로 제14회 동서문학상, 2003년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로 제34회 동인문학상을,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로 2005년 대산문학상을, 단편 『달로 간 코미디언』으로 2007년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