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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세상을 삼킨 책[Das Buch in dem die Welt verschwan

[책갈피] 2008. 9. 26. 20:01

세상을 삼킨 책[Das Buch in dem die Welt verschwand]


1781년 5월, 독일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철학교수인 <임마누엘 칸트>가 베를린의 스페너 출판사에서 펴낸 학술서 『순수이성비판』은 흔히 근대철학의 기초를 다진 저작, 계몽주의의 기반을 제공한 철학서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할  문제가 아니다.  칸트의 이 작업은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처럼 고대와 중세 기독교 문명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동원됐던 철학을 신학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처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경험이 없이 이루어진 학문들 종교학, 논리학, 수학을 다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2쇄가 인쇄될 당시에는 유럽 전역의 큰 관심과 커다란 방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1835년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순수이성비판』이 던진 파장을 이렇게 설명했다.  “칸트는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심지어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그 어떤 증거 제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어떤 종교적인 느낌이 나 자신을 제지하지 않을 때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은 원리론과 방법론으로 나뉘었는데 원리론은 다시 선험적 감성론(先驗的感性論)·선험적 논리학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선험적 논리학은 또다시 선험적 분석론과 선험적 변증론으로 되어 있다.  칸트는 이 책에서 인간이성의 권한과 한계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적 성립가능성을 묻고 있다. 또한 종래의 독단적 형이상학을 뒤집어 인간 중심의 세계를 완성하였다. 칸트는 어떤 것이 인간의, 인간 외부의 자연에, 인간에게서 독립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이 그것에 대응하는 경험적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진리, 즉 과학적인 선험적 종합판단은 우리가 외부 사물을 올바르게 모사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스스로의 선험적인 형식에 의해 자발적으로 만들어 낸 것에 대한 판단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구성이 자기의 능력에 따르는 자발적인 것이기에 그것은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아무리 초라하더라도 경험이나 대상이 존재하는 한, 언제나 그 형식적인 종합이 작용하고 있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객관적이기도 하다. 인간의 자발성에 의해 이러한 자연의 대상이나 경험이 가능해지고, 거기서 나오는 여러 법칙을 파악할 수 있으며, 선험적 종합 판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천계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생각을 뒤집고 오히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운행한다는 지동설을 주장해서 인간 인식을 전환시켰다.  칸트는 자신의 철학적 성과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비유했다. 그는 외계의 대상이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지금까지의 설을 뒤집어, 인간이 스스로 선험적 형식을 가동시킴으로써 그러한 대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코페르니쿠스가 천문학에서 성취한 인간 의식의 전환을, 칸트는 자신이 철학의 인식론에서 성취시켰음을 자부해서 자신의 인식론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누구 하나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볼프람 플라이쉬하우어>의 장편소설『세상을 삼킨 책』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출간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음모와 살인사건을 그린 팩션이다.  작가는『순수이성비판』이란 책을 중심에 놓고 당시의 철학과 사상의 세계를 촘촘하고 흥미롭게 그려낸다. 칸트의 사상은 너무나 거대하고 광범위해서 출간 당시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작가는 그 책의 치명적인 위험을 알아챈 일부 종교인들이 필사적으로 출간을 막으려고 했다는 상상력을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야기는 의사 ‘니콜라이 뢰쉬라웁’의 입장에서 펼쳐진다.  노인이 된 그는 막 개발된 증기기관차를 타고 손녀와 함께 뉘른베르크로 향한다. 그곳 수녀원에서 그는 젊은 시절, 사랑했던 여인 막달레나를 찾는다. 그러면서 뢰쉬라웁은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린다.  50년 전인 1780년, 뉘른베르크의 젊은 의사였던  뢰쉬라웁은 알도르프 백작의 성으로 부름을 받는다. 며칠 전부터 서재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백작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결국 백작은 죽은 채로 발견되고 왼쪽 폐엽에 특이한 부종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는 계속되는 살인사건의 희생자가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 중의 하나였다.

 시신의 상태를 조사하던 니콜라이는 우연한 기회에 독일 곳곳에서 벌어지는 우편마차 화재 사건 수사를 젊은 수사관 디 타시의 제의에 따라 조사하게 된다. 사건에 깊숙이 개입한 뢰쉬라웁은 일련의 사건들이 출판사와 서점상과 책이 관련돼 있음을 알게 된다.  조사 과정 중에 그는 아름답고 미심쩍은 여인 막달레나를 만나면서 서서히 장미십자회, 일루미나티(조명파), 프리메이슨 같은 비밀결사대의 존재와 그들의 정치적 음모에 연루된다.

 

 

이 소설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몰고 올 책의 출간을 막으려는 음모가 숨가쁘게 펼쳐진다. 선과 악의 대칭을 넘어서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계몽과 미신, 이성과 혼란의 대결이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정신사, 의학사, 철학사 분야를 넘나들며 진행되는 사건의 중심에는, 순수 이성과 그것의 파괴적인 힘에 대해 비판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있다. 귀족들은 칸트의 새로운 생각을 두려워하고 프리메이슨 비밀결사대는 『순수이성비판』의 인쇄를 막으려고 온갖 음모를 꾸민다. 미신이 횡행하던 때에 『순수이성비판』이 철학과 종교가 분리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상기하면, 책의 위력은 가히 세상을 삼킬 만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정말로 하나의 사상이 세상에 혁명을 가져올 수 있을까? 이성의 빛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새로운 사상의 빛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살인을 통해 그 빛을 가릴 수 있을까?  이는 어쩌면 인류 지성사에 있어 영원하면서도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볼프람 플라이쉬하우어[Wolfram Fleischhauer]

1961년 독일 남서부 지방의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카를스루에에서 태어났다.  열일곱 살에 미국 오하이오 주의 워런에서 교환학생 시절을 보내다가 1년 후 다시 카를스루에로 돌아와 김나지움을 다녔으며 어렵지 않게 아비투어를 통과했다.  그 후 스페인, 프랑스, 미국에서 어문학 공부를 했다.  12년 동안 영어 통역사와 번역가로 일하면서『퍼플라인』을 위한 조사를 했고, 1996년, 죽음의 비밀을 간직한 루브르 명화 한 점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 자매>의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퍼플라인』을 출간해 문학적․학술적 업적을 이루어 냈다.  움베르토 에코의 “이 소설에 경의를 표한다.”라는 의미심장한 한마디 말로 작품성을 입증 받은 이 소설은 할리우드 영화사 펜티멘토에 영화 판권이 팔렸으며 한국을 포함한 10여 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2003년에, 18세기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출간으로 철학과 종교의 길이 최종적으로 분리되었으며 이 책으로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열린 데 착안해서 쓴 『세상을 삼킨 책』을 발표하게 된다. 이로써 그의 예술 스릴러 4부작 『퍼플라인Die Purpurlinie』(그림), 『비의 손을 가진 여인 Die Frau mit den Regenhänden』(문학), 『현실과의 3분 Drei Minuten mit der Wirklichkeit』(음악과 춤), 『세상을 삼킨 책 Das Buch in dem die Welt verschwand』(철학과 역사)은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