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 신화와 인신공양
박 병 규

▲ 아스테카 제국의 ‘태양의 돌’. ‘아스테카 달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직경 3.6m, 무게 20톤에 달하는 이 유물은 정복 후 270년도 넘게 땅속에 묻혀 있다가 1790년 12월 17일 발견되었다. 멕시코 국립 인류학 박물관(Museo Nacional de Antropología) 소장
아스테카(Azteca) 제국이 남긴 수수께끼 가운데 사람을 산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만큼 다양한 해석과 논란을 야기한 대상도 없을 것이다. 역사를 뒤적거려보면 인신공양은 아스테카 제국뿐만 아니라 인류사의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정도로 세계 각지에서 행해진 의식이었다. 성서를 보더라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삼은 기록이 있으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심청전에도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스테카 제국의 인신공양이 주목을 끄는 데는 몇 가지 까닭이 있다. 첫째, 1520년이라는 시점이다. 이 때에 이르면 대부분의 문명에서는 인간 대신에 양, 닭, 돼지 같은 동물을 희생물로 바쳤다. 당시의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마야(Maya)나 잉카(Inca)에서는 더 이상 행하지 않던 의식인데, 상당한 문화수준을 자랑하는 아스테카 제국만이 유독 이 제의를 고집하고 있었다.
둘째, 인신공양의 빈도와 규모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아스테카 제국에서 인신공양은 대규모로 자주 치러졌다. 희생자의 두개골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제단을 일컬어 촘판틀리(tzompantli. 마야에도 이러한 제단이 있으나 석재에 부조로 두개골을 새겨놓았을 뿐이다)라고 하는데, 16세기 안드레스 데 타피아(Andrés de Tapia)는 “신전의 한쪽 벽에만 13만 6천개의 인골이 있었다”고 전한다.

▲ 아스테카 제국의 촘판틀리. 토바르 고문서(Tovar Códice)
이에 대해 현대 일부 학자들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정치적 목적에서 희생 의식의 빈도와 희생자의 숫자를 지나치게 과장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천재지변과 같은 재앙이 발생하거나 기타 특수한 상황에 봉착했을 때에만 희생의식을 올렸으며, 대규모 인신공양을 바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타문화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인신공양의 빈도와 규모가 상당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셋째, 식인풍습이다. 아스테카 제국은 인간을 제물로 바쳤을 뿐만 아니라 인육(人肉)을 섭취하기도 하였다.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1485-1547)와 함께 아스테카 제국 정복 전쟁(1521년)에 참여한 프란시스코 데 아길라르(Francisco de Aguilar, 1479-1571) 수사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페르시아 역사, 그리스 역사, 로마 역사 등 많은 역사책을 읽었다. 그리고 포르투갈 인디아의 의식[역주. 브라질 원주민의 식인 풍습]도 읽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저들[역주. 아스테카인들]만큼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악마를 섬기는 얘기를 읽은 적이 없었다. [...] 거대한 탑 위에 신전이 있었고, 신전 입구 바로 앞에 무릎 높이만한 돌 제단이 놓여있었다. 이 제단에 희생으로 바칠 여자들과 남자들이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그들은 조용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윽고 사제가 문에서 나왔는데, 손에는 돌칼을 들고 있었다. 돌칼은 아무것도 자르지 못할 정도였으며, 모양은 창끝과 같았다. 사제는 돌칼로 가슴 부위를 절개하고 심장을 들어냈는데, 희생자는 입도 벙끗하지 못했다. 이윽고 희생자(여자 또는 남자)가 죽으면 돌계단 아래로 굴렸다. 그러면 신전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희생자를 잔인하게 토막 내서 불에 구어 먹었다. 이것이 그들이 신에게 희생을 바치는 방식이다.

▲ 인신공양에 사용한 돌 칼
우리의 눈으로 보면 섬뜩하고 잔인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광경인데, 그렇다면 아스테카 제국에서는 무엇 때문에,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인신공양을 드렸을까? 단정적인 대답을 듣기 어려운 질문이다. 설령 아스테카 제국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본다 하더라도 명쾌한 대답을 듣기 힘들 것이다. 이런 연유로 인신공양은 정복 직후부터 논란의 대상이었으며, 역사를 거치면서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1. 야만과 미개의 증거 - 식민지배자의 견해
1) 세풀베다와 라스카사스의 논쟁
아스테카 제국의 인신공양은 정복 초기 식민지배자들에 의해 원주민에 대한 무력 정복과 폭력적 지배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이용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인문주의자 세풀베다(Juan Jiménez Sepúlveda, 1490-1573)와 라스카사스(Bartolomé de las Casas, 1484-1566) 신부가 1550년 스페인의 바야돌리드(Valladolid)에서 벌인 논쟁을 들 수 있다.
세풀베다는 스페인 왕실 소속의 고위 성직자이자 인문주의자로 식민지배자들의 이익과 논리를 대변하였으며, 이재에도 밝아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인물이다. 이러한 세풀베다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무력 정복을 옹호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었다.
① 인신공양에서 잘 드러나듯이, 원주민은 우상을 숭배하고 또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죄를 저질렀다. ② 원주민은 천성적으로 야만적이고 미개한데, 이는 어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적 성품을 갖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완전히 부합한다. ③ 따라서 군사적 정복은 원주민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④ 그 뿐만 아니라 군사적 정복을 통해 신체가 나약한 원주민을 보호할 수 있다. 요약하면, 원주민의 인종적 열등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무력 정복을 정당화했다.
반면에, 라스카사스 신부는 이스파뇰라(Hispaniola. 현재의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원주민을 데리고 농장을 경영하였으나 원주민을 학대하지 말라는 몬테시노스(Montesinos) 신부의 설교를 듣고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서 농장을 포기하고 성직자 길을 선택한 사람이다. 그 후, 아메리카 땅에서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멕시코 치아파스 지방에서 신부로 활동하면서 원주민 인권 옹호에 일생을 바쳤다. 이러한 이력의 라스카사스는 다음과 같은 논변으로 원주민을 옹호하였다.
① 원주민의 예술, 학습 능력을 보면 결코 잔인하거나 비인간적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이성적인 존재이다. ② 회교도와 유대교도 역시 비기독교도이지만 억압과 강제 노동에 저항할 권리가 있듯이, 원주민 또한 저항권이 있다. ③ 아메리카 원주민만 우상을 숭배하고 인신공양을 드린 것은 아니다. 고대 스페인, 그리스, 로마에서도 우상을 숭배하였으며, 어떤 형식으로든 인신공양이 있었다. ④ 인신공양을 금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은 무력이 아니라 가르침과 설득이다.
이러한 라스카사스 신부의 노력으로 1542년 스페인 왕실은 원주민에 대한 식민지배자들의 권한을 제한하는 이른바 ‘신법’(新法)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 법은 식민지배자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현실적으로 효력을 발휘한 적도 없었으며, 1549년 스페인 왕실은 식민지배자들을 위해 다시 법을 개정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에 와서는 라스카사스 신부를 ‘원주민의 옹호자’ 또는 ‘최초의 해방신학자’라고 부른다. 현실에서는 패배하고 역사에서는 승리한 셈이다. 그러나 세풀베다와 라스카사스 신부의 차이란 결국 방법론의 차이에 불과하다. 라스카사스 신부도 원주민을 기독교 세계로 동화시키고, 나아가서는 식민지배 체제 속으로 편입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었다. 다만 교화와 같은 온건한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고 역설한 점에서 무력 정복이라는 확실하고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한 세풀베다와 다를 뿐이다.

▲ Félix Parra, , 1875 oil on canvas, Museo Nacional de Arte (Mexico City). 원주민의 보호자 라스카사스 신부. 그러나 빛이 강하면 어둠 또한 깊다고 했던가? 라스카사스 신부는 노동력이 부족하면 원주민 대신에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를 데려와 일을 시키면 된다고 주장했고, 이로써 흑인노예 수입이 급증했으니, 아메리카의 흑인노예는 원주민 보호에 열중한 라스카사스 신부가 드리운 깊은 어둠이다.
2) 원주민 이미지의 형성
이렇게 형성된 원주민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원주민이 미개하고 열등한 종족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세풀베다가 처음도 아니었고, 끝도 아니었다. 아스테카 제국을 정복한 에르난 코르테스는 스페인 왕실에 보낸 『보고서』에서 “스페인 왕의 이름으로 이 야만족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왔다”고 썼다. 오비에도(Gonzalo Fernández de Oviedo, 1478-1557)는 『인디아스의 자연사와 일반사 요강』(1527)에서 원주민은 게으르며, 열등하고, 악습에 절어있을 뿐만 아니라 두개골의 용량을 감안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할 능력도 없다고 단언했다.
서구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태평양에 발을 담그고 멱을 감은 발보아(Vasco Núñez de Balboa, 1475-1519)는 원주민이 추잡한 남색(男色)에 빠져 성적으로 문란하며, “유방이 없고 출산을 못할 뿐 여자나 마찬가지”라는 이유로 맹견 레온시코(Leoncico)를 동원하여 원주민들을 물어뜯어 죽였다. 멕시코의 어떤 부왕은 원주민들이 “천성적으로 타고난 나쁜 성품”을 고치기 위해서는 광산 노동보다 더 좋은 치료법이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 드 브리(Theodor de Bry, 1528-1598)의 판화. 맹견을 동원하여 파나마 원주민을 학살하는 발보아. 독일에서 출판된 이 판화는 ‘흑색선전’을 널리 유포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정복자와 식민통치자들 탓에 원주민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라는 통속적인 이미지 널리 유포되자, 교황 바오로 3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Sublimis Deus, 1537)이라는 교서를 발표하고, 원주민은 영혼과 이성을 가진 인간 존재라고 명기하였다. 그러나 이런 교서 하나로 정복과 지배라는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서 주조된 타자(원주민)에 대한 이미지가 바뀔 수는 없었다.
라스카사스 신부의 고발을 접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는 스페인 정복자와 식민통치자들의 잔혹한 처사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를 가리켜 스페인 사람들은 흑색선전(leyenda negra)라고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원주민의 인권에 대한 관심보다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아메리카 식민지를 다스릴 능력이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1495년 토르데시야스 조약(Tordesillas)을 맺어 아메리카를 분할 독점해버리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는 스페인 정복자들의 만행을 구실로 내세워 아메리카라는 빵을 한입 베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국가도 식민지를 건설한 다음에는 스페인, 포르투갈의 정복자들 못지않게 원주민들을 학살하거나 탄압하였고, 이에 부응하여 서구의 유명한 학자들 또한 스페인 정복자들보다 훨씬 정교한 철학적, 종교적, 생물학적, 인류학적 담론을 주조하여 원주민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부단히 재생산했다.
이를테면, 아메리카에 가본 적도 없는 볼테르(1694-1778)는 원주민이 얼간이에 게으름뱅이라고 주장했으며, 그 뒤를 이어 베이컨(1561-1626), 보댕(1530-1596), 몽테스키외(1689-1755), 흄(1711-1776)도 원주민을 열등한 종족이라고 폄하했다. 또한 획득형질이 유전된다는 학설을 내세웠기 때문에 현대 유전학의 시조로 평가받는 뷔퐁(Buffon, 1707-1773)은 “신세계의 퇴화한 인간들”을 아예 인류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헤겔(1770-1831)은 어떠했는가? 정신적 · 육체적으로 무능한 원주민은 유럽이라는 바람을 한 번 맞더니 그 자리에서 사멸해버렸다고 얘기했다.
이처럼 쟁쟁한 서구 지식인들의 인종차별 담론 덕분에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원주민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957년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 소재의 카톨릭대학 인류학 연구센터에서 실시한 앙케트 조사에 따르면 파라과이인 10명 중 8명은 “인디오는 동물과 같다”고 생각한다. 1960년대 말, 페루의 벨라스코(Velasco Alvarado, 재임 1968-1975) 정권은 인디오라는 말의 이미지 너무 나쁘기 때문에 농민(campesino)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인디오의 날’(Dia del Indio, 6월 24일)을 ‘농민의 날’로 개칭하였다. 이후 페루의 모든 공공 문서에서 인디오라는 말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과테말라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리고베르타 멘츄(Rigoberta Menchú)의 증언이나 1994년 멕시코 치아파스 원주민들의 저항(EZLN)의 저항이 웅변으로 증거하고 있듯이, 원주민에 대한 차별은 중남미 곳곳에 남아 있다.
많은 인류학자들은 인신공양을 거행한 아스테카인을 포함하여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결코 미개인이나 야만인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또한 원주민들이 생물학적으로 열등하거나 지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객관적 근거도 없다. 이러한 학문적 논변에도 불구하고 정복 이래 피지배자에게 둘러씌워진 갖가지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억압의 굴레가 벗겨지지 않는 한 원주민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언제까지나 재생산될 것이다. 흑인과 마찬가지로 원주민도 천성적으로 게으르고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원주민이기 때문에 게으르고 열등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인신공양도 야만의 근거가 아니라 타자에게 야만이라는 딱지를 붙이기 위한 빌미였다.
2. 종교 의식과 신성의 체험
1) 태양신화에서 본 인신공양
20세기에 들어와 알폰소 카소(Alfonso Caso)와 자크 수스텔(Jaques Soustelle)은 아스테카의 인신공양을 종교 의식의 차원에서 해석했다. 한마디로, 인신공양은 태양신화에 비추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는 주장이다.
아스테카의 태양신화에 따르면, 지금까지 세상에는 4개의 태양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네 번째 태양이 사라지자 신들은 테오티우아칸(Teotihuacán, 태양 피라미드와 달 피라미드가 있는 멕시코시티 근교의 유적지)에 모여 다시 태양을 살릴 방안을 의논했다. 유일한 방법은 신이 희생하여 태양이 되는 것인데,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아 제비를 뽑았다. 그러나 제비뽑기로 당첨된 멋쟁이 신 카라콜레스는 선뜻 모닥불에 뛰어들지 못하고 몇 번이고 망설였다. 이를 지켜보던 못난이 신 푸룰렌토가 불 속으로 뛰어들어 태양이 되었다. 그리고 끝까지 망설이다가 모닥불 속으로 떠밀려 들어간 멋쟁이 신은 달이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섯 번째 태양(el quinto sol), 즉 ‘운행(運行)의 태양’이 바로 아스테카인들을 비추는 태양이었다.
이처럼 신들이 자신을 희생하여 태양이 되었고, 그 덕분에 인간들은 현재의 삶을 누리게 되었으니 신들처럼 인간들도 희생제의를 통해 신을 성심껏 공양해야 태양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신공양은 아스테카인들의 심오한 우주관의 표현이며, 논란이 많은 식인풍습 또한 이미 신으로 화한 인간을 먹는다는 점이 특이할 뿐, 기독교의 성체배령과 유사하다고 얘기한다.
나아가서 인신공양의 빈도나 규모에 대한 스페인 정복자들의 기록도 과장되었다고 한다. 사실, 아스테카의 달력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365일 주기의 태양력이요, 다른 하나는 260일 주기의 종교력이다. 이 종교력에 따라 희생물을 바쳐야 할 때가 다가오면 이른바 ‘꽃의 전쟁’(Xochiyaoyotl)을 일으켜 인신공양에 필요한 포로를 잡아왔다(틀락스칼라(Tlaxcala)와 같은 주변 왕국이 희생물의 주요 공급처였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아스테카의 인신공양은 아무 때나 마구잡이로 행한 의례가 아니며, 순수한 종교적 의식으로서 꼭 필요한 시기에 치러진 제의라고 해석한다.

▲ 아스테카 제국의 대신전(Templo mayor) 복원도. 이 신전의 유적은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 옆에 있다.
실제로 아스테카인들도 인신공양을 종교의식으로 수용하였던 것 같다. 코르테스와 함께 아스테카 제국의 정복에 참여한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Bernal Díaz del Castillo, 1492-1584)의 『누에바 에스파냐 정복의 진실』(Historia verdadera de la conquista de la Nueva España)에는 이런 기록이 보인다. 어느 날, 아스테카 황제 목테수마(Moctezuma 또는 Motecuhzoma Xocoyotzin, 1466-1520)는 코르테스 일행에게 대신전(Templo Mayor)을 공개했다. 아마도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목테수마 황제의 기대와 달리 코르테스 일행은 여기저기 피딱지가 묻어있고 심장이 내걸려 있는 섬뜩한 광경 앞에서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야심만만한 정복자 코르테스는 웃는 얼굴로 목테수마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목테수마 씨, 당신처럼 위대하고 현명한 사람이 악마처럼 사악한 우상밖에 생각할 줄 모른다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도 이미 그것을 알고 있고, 또 사제들도 분명히 알고 있으므로 청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 신전 꼭대기에 십자가를 세우고, 또 우이칠로포치틀리(Huitzilopochitli: 전쟁의 신)와 테스카테푸카(Tezcatepuca: 하계의 신)를 모신 사당에 성모마리아상(목테수마는 이미 성모마리아상을 본적이 있었다)을 안치하면 좋겠습니다.” [...] 그러자 목테수마는 조금 성난 목소리로 대답했고, 수행하던 사제 두 사람은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린체 씨[주. 에르난 코르테스], 당신의 말처럼 그렇게 불경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 더 이상 신들을 보여주지 않겠습니다. 이 신들은 우리에게는 선신(善神)입니다. 우리를 건강하게 보살피고, 물을 주고, 비옥한 경작지와 좋은 날씨를 선사하며, 우리가 원할 때는 승리를 안겨다 줍니다. 따라서 신을 숭배하고 희생을 바쳐야만 합니다. 원컨대, 그런 불경한 말은 삼가시오.”

▲ 목테수마가 코르테스를 만났을 때. 코르테스 뒤에 흰옷을 입고 서 있는 여자(그림 오른쪽)가 코르테스의 통역관이자 정부인 말린체(Malinche)이다. 말린체는 아스테카 제국으로부터 핍박받던 틀락스칼라(Tlaxcala) 출신으로, 아스테카 제국을 멸망시키는 데 필요한 갖가지 정보를 스페인군에게 제공하였다. 코르테스 정복 이후, 아스테카인들은 콰우테목(Cuauhtemoc)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저항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2) 인신공양과 신성: 존재의 연속성 체험
순수한 종교 의식으로서 인신공양은 어떤 의미일까? 이런 질문에 나름대로 대답을 시도한 사람이 조르쥬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1897-1962)이다. 바타이유는 프로이트가 『토템과 타부』에서 얘기한 타부의 양가감정, 즉 금지된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를 위반하고 싶은 인간의 심리에 바탕을 두고 논의를 전개한다.
바타이유에게 에로티즘이란, 심정의 에로티즘이건, 육체의 에로티즘이건, 신성의 에로티즘이건 모두 폭력적이며 파괴적인 금기의 위반이다. 이러한 폭력과 위반은 인간 존재가 천형처럼 짊어진 불연속성(유한성)을 넘어서 연속성(무한성)을 얻으려는 열망의 표현이다. 이와 유사한 일상의 경험으로는 사랑을 들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과 타인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존재의 심연을 뛰어넘어 상대에게서 나의 연속성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서, 심정의 에로티즘으로서 사랑이란 인간의 일상적인 삶을 지배하는 불연속적인 질서가 파괴되고 와해된 상태이다.
이런 전제에서 바타이유는 희생제의 논의를 전개한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금기이며,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기준 또한 금기이다. 이런 면에서 죽음과 폭력은 인간에게 금지된 것이며, 오로지 인간을 초월한 동물이나 초자연적인 존재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이런 까닭에 금기를 지키지 않는 동물은 때때로 인간보다 더 신성하게 보일 수도 있다. 만약 인간이 금기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금기를 위반하는 인신공양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 돌입한다면 신성을 체험한다. 이쯤에서 바타이유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희생물이 죽으면, 참관자들은 그 죽음이 계시하는 본령에 참여한다. 종교사가들의 말을 빌리면 그 본령이란 신성이다. 신성이란 바로 엄숙한 의식이 집행되는 동안 불연속적인 존재의 죽음을 참관하던 사람들에게 계시되는 존재의 연속성이다. 격렬한 죽음은 희생물이라는 불연속적인 존재를 파괴시킨다. 침묵이 감돌고, 남는 것은 희생제물이 도달한 존재의 연속성이다. 우리가 평소에 모르던 이런 느낌은 오직 장중한 종교적 죽음이나 집단적 상황에서 죽음이 가져다줄 수 있는 느낌이다.
따라서 아스테카 제국의 인신공양과 같은 희생제의는 죽음과 삶을 일치시키는 원리를 포함한다. 희생제의에서 희생자는 그 희생의 집행자와 하나가 됨으로써 평등한 관계에 놓이며, 집행자는 희생자의 고통과 자신의 고뇌를 일치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희생은 죽음에서 삶의 분출을 이끌어내며, 삶에게 죽음의 문을 열어 죽음의 무게와 죽음의 혼미를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죽음은 무한으로 열린 삶의 상징이 된다. 이런 죽음을 참관함으로써 불연속적인 존재인 인간은 연속성이라는 불가능한 꿈에 도달한다는 것인데, 이런 바타이유 논리는 ‘행위 자체의 미학’에만 함몰되어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 전쟁의 신, 우이칠로포치틀리(Huitzilopochtli). 아스테카 신화에 등장하는 여러 신들 가운데 아스테카 부족 고유의 신이자 최고의 신이다. 연대기의 기록에 따르면, 우이칠로포치틀리의 명령은 언제나 소수 제사장들의 엄숙하고 단호한 목소리를 통해서 일반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이에 근거하여, 제사장은 신의 목소리를 빌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려고 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3. 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
1) 태양신화라는 허구
20세기에 들어와서 신화 일반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논의가 전개되는 동안, 인신공양이 아스테카 제국의 태양신화에 따른 숭고한 종교의식이었다는 견해는 세주르느(Laurette Séjourné)와 베르날(Ignacio Bernal) 등에 의해 나이브하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실, 아스테카인들은 수세기에 걸쳐 정착지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을 유랑하던 종족으로 복종, 단결, 규율과 같은 덕목을 중시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13세기 중반 멕시코 고원지대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그들보다 문화적으로 우월한 여러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전쟁과 폭력을 동원하여 선주민들을 지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강고한 지배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과거의 기억을 말살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스페인 정복자들만이 아스테카인들의 역사를 부정했던 것이 아니라 아스테카인들 역시 역사를 파괴한 것이다.
그러나 필요한 경우에는 선주민의 문화를 수용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태양신화이다. 태양신화는 아스테카의 고유 신화가 아니다. 아스테카인은 달(月)의 탄생을 이렇게 얘기한다. 대지의 신 코아틀리쿠에(Coatlicue)가 부정을 저질러 우이칠로포치들리를 잉태하자, 딸 코욜사우키(Coyolxauhqui)는 동생들과 공모하여 어머니를 죽이기로 작정한다. 막 목을 자르려는 순간, 완전 무장한 우이칠로포치틀리가 어머니 배를 가르고 나타나서 형제들을 죽이고 누이를 죽여 하늘에 흩뿌렸다. 밤하늘의 총총한 별은 이 때 죽은 형제들의 시신이며, 저 달은 누이 코욜사우키이다.

▲ 어머니를 죽이려다 동생 우이칠로포치틀리에게 살해된 코욜사우키(Coyolxauhqui). 석재 부조. 직경 330cm. 멕시코시티의 템플로 마요르 박물관(Museo del Templo Mayor) 소장. 1978년 멕시코시티에서 전력공사를 하던 인부가 우연히 발견했다.
태양신화에서 달은 멋쟁이 신 카라콜레스인데, 아스테카 신화에서 달은 코욜사우키인 것이다. 이에 덧붙여, 아스테카의 인신공양이 행해진 장소는 태양신을 모신 사원이 아니라 우이칠로포치틀리와 테스카테푸카를 모신 대신전이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아스테카인들이 태양신화 때문에 인신공양을 드렸다는 해석은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오히려 인신공양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신이 스스로를 희생하여 세상(혹은 태양)을 만들었다는 신화를 이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아스테카인의 시를 보면 지상의 삶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그들의 세계관에는 내생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인신공양으로 희생된 자, 전사자, 출산하다가 죽은 여자 그리고 물에 빠져 죽은 여자뿐이었다. 여기서 드러나듯이, 인신공양, 전쟁, 출산, 물은 아스테카 제국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가치이자 자원이었다. 이 지역은 대부분 석회암 지대인데다 일년 중 반은 건기이고 반은 우기여서 물이 귀했다. 또 제국을 유지하려면 물자공급이 원활해야 했고, 공물을 징수하려면 전쟁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아이를 많이 낳아 용감한 전사(戰士)로 길러야 했다.
인신공양도 이러한 아스테카 제국의 현실적인 필요성에 부응한 행사였다. 아스테카 제국에서 희생자는 언제나 주변의 약소국에서 붙잡아온 포로의 몫이었으며, 시시때때로 전쟁을 일으켜 사랑하는 아들과 남편과 아내를 끌고가 희생물로 바쳤기 때문에 주변 국가에게는 원성의 대상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대규모 인신공양은 1487년 대신전(Templo mayor)이 완성되었을 때인데, 3일간 계속된 이 축제에서 희생된 포로는 줄잡아 2만 명에서 8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는 제국의 힘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함으로써 피지배자들의 충성심을 유도하고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반역을 미연에 차단하려는 목적에서 행한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로하스(José Luis Rojas)는 이렇게 주장한다. “희생자의 인육은 일정한 형식에 따라 소비되었다. 이러한 식인풍습은 식량의 부족 때문도 아니요, 인구 통제의 목적도 아니다. 오히려 메히카(mexica)족의 통치형태인 공포체제를 정당화하려는 이데올로기적 기초였다.” 만약 신성한 종교적 목적으로 희생제의를 치렀다면 포로와 같은 열등한 인간 대신에 최상층의 지배계급에 속하는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태양신화는 인신공양을 합리화하는 허구이자 상징체계였다.
* 메히카: 아스테카족의 또 다른 이름. 아스테카는 아사틀란(Azatlán) 출신이라는 뜻이며, 메히카는 메히코 출신이라는 뜻이다. 일설에 따르면, 우이칠로포치틀리의 또 다른 이름이 메히(Mexi)이므로, 메히카란 우이칠로포치틀리의 후손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아무튼 이 메히카에서 멕시코라는 국명이 유래했다.
2) 제의적 폭력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희생양』에서 신화를 분석함으로써 희생제의라는 집단 살해 혹은 집단 폭력에 내재한 사회 유지 메커니즘을 밝혀내고 있다. 신화는 희생물에 대한 집단살해의 기록인데도 불구하고 박해자의 시선으로 씌어졌기 때문에 희생자는 때로는 죽어 마땅한 자나 아니면 숭고한 자원자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인신공양과 같은 희생제의는 “어떤 한 사회가 동물이나 인간과 같은 희생물을 바쳐서 신의 노여움을 풀고 신의 은혜를 기대하는 의식”이 아니라 그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원초적인 폭력을 실제로 행한 것에 불과하다. 즉, 신성이라는 의미가 부여된 희생이란 실제로는 집단 내부에 존재하는 원초적 폭력을 특정 개인이나 집단으로 돌림으로써 사회 안정을 유지하는 제도이다. 이 때, 희생당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희생당할 만하다는 논리로 포장된다.
따라서 인신공양을 집행하는 집단 전체나 이러한 의식을 통해서 이익을 보는 집단의 논리로 보면, 인신공양과 같은 희생제의는 집단의 유해한 부분을 제거하는 유익한 의식이겠지만, 제단에 끌려간 희생물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 아스테카 제국이 정복한 국가로부터 거두어들인 공물. 귀족만이 사용하던 케찰 새의 깃털과 재규어 가죽 등이 보인다. 출전 : 멘도사 고문서(Códice Mendoza)
4. 생태학적 해석
아스테카, 마야, 잉카 문명의 근본적인 차이 가운데 하나는 인신공양이다. 물론 이들 세 문명은 모두 인신공양을 드린 적이 있으나 16세기에 이르면 마야와 잉카에서 희생물은 인간이 아니었다.
마야인의 사고방식에서 피는 생명이고, 옥수수이며, 물이었다. 피는 생명을 산출하는 유일한 것이며, 따라서 신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좋은 공양이다. 우기가 되어도 비가 오지 않으면 마야의 왕이나 사제는 흑요석 칼, 동물의 이빨, 용설란의 가시, 담요 짜는 바늘 등을 이용해서 혀나 귓불이나 팔이나 다리나 코나 성기에 구멍을 내, 흘러나온 피를 대지에 뿌렸다. 종종 인간을 희생 제물로 바치기도 했으나 대규모 행사는 아니었다.
잉카제국에서는 6월에 개최되는 태양제(Inti Raymi)에서 인간을 산제물로 바쳤다. 이러한 희생제의는 잉카제국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잉카제국에서는 마지막 순간에 희생자의 이름이 붙은 동물(흔히 야마)로 대체하였다.
그러나 아스테카에서 인신공양은 대규모로 그리고 주기적으로 행해졌다. 그리고 희생물로 바친 인육을 나눠 먹기도 했다. 이러한 희생은 우주창조 신화로 정당화되기는 했으나 당시 사람들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것은 아니다. 왜 아스테카 제국에서만 이러한 인신공양이 지속적으로 행해졌을까?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는 『식인과 제왕』에서 아스테카 제국의 인신공양을 음식문화와 관련지어 설명한다. 아스테카 제국은 ①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인구 증가 ② 생산 강화 ③ 자연 고갈 ④ 생식 압력이라는 악순환을 겪었다. 이 경우, 생식압력을 원천적으로 해소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유아 살해, 전쟁 혹은 피임인데, 아스테카의 경우는 다른 방안을 찾았다고 한다.
정복 당시의 기록을 보면 10만개이상, 13만 5천개의 두개골 탑(Tzompantli)이 있었다. 이처럼 대규모 인신공양이 치러진 이유는 멕시코에 가축으로 기를 만한 동물이 멸종되었기 때문에 단백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으며(아스테카인들은 뱀을 잡아먹었다), 이렇게 부족한 단백질을 지속적이고 값싸고 보급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인육을 섭취하는 길밖에 없었다는 것이 마빈 해리스의 설명이다. 잉카제국에는 인신공양이나 식인풍습이 없었으며, 잔학 행위를 금했던 이유는 바로 야마(llama)라는 동물을 통해 필요한 단백질을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안데스 지방의 야마. 알파카(Alpaca), 비쿠냐(Vicuña)와 더불어 이 지방 원주민들에게는 운송수단이자 털과 고기를 제공하는 동물이다.
5. 맺는말
아스테카의 인신공양과 관련된 다양한 견해와 논란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역사란 단순한 실체적 진실의 집적이 아니라 이에 대한 때묻은 해석과 평가의 총합으로 보인다.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 1818-1897)가 그랬던가, “결국 우리가 그린 역사의 그림은 대부분 완전한 허구”라고.
한편, 아스테카의 인신공양은 우리 세계 안에 내재하는 폭력구조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각종 신화로 미화되고 법으로 정당화되고 있어서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거대한 폭력은 후세에게 아스테카 제국의 인신공양 못지않은 비인간적인 만행이자 악으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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