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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원제 : BIR SURGUNUN ANILARI] 본문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
[원제 : BIR SURGUNUN ANILARI]
터키 국민작가 <아지즈 네신>이 자신의 유배 생활을 바탕으로 쓴 소설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는 포복절도할 웃음과 다채로운 이야기 속에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존재의 깊은 슬픔을 만나게 되는 작품으로 60여 년 전 터키의 소도시에 유배된 한 지식인의 기록을 담았다. 특별히 자신의 체험이 절절히 녹아 있는 이 작품은 부끄럽지 않은 실천적 지식인으로 살아온 작가의 진면목을 생생히 느끼게 한다.
소설은 작가 아지즈 네신이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소도시 부르사로 유배 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당시 일당제인 공화인민당(CHP) 정권하에서 터키 이스탄불은 계엄령이 선포된 상태였고, 정부의 심기를 거스른 사람은 누구라도 유배지로 보내지던 상황이었다.
1946년 주간 풍자잡지 '마르코파샤'를 발간하고 있던 작가는 현대판 제국주의가 터키를 잠식하던 상황에 경종을 울리고자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제작하기로 한다. 반정부 성향의 ‘마르코파샤’ 때문에 네신을 주목하고 있던 터키 경찰은 인쇄소를 급습해 한쪽 면만 인쇄된 팸플릿을 압수하고 네신을 체포한다. 이 과정에서 네신이 유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경찰은 형법조문을 모조리 뒤져 죄목을 붙인다. 그리하여 찾아낸 것이 ‘출판을 통해 국가 이익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라는 터키 형법 제161조항.
그런데 문제는 출판 활동이 성립되려면 최소한 두 명 이상이 글을 읽어야 한다는 것. 채 인쇄도 되지 않은 팸플릿을 성급히 압수했던 경찰은 인쇄소 주인과 조판한 식자공, 인쇄 기술자를 잇달아 불러내 "팸플릿을 읽었다"는 증언을 끌어내려 안간힘을 쓴다.
“당신 읽었지? 분명 읽었을 거야.”라는 말이 반복되는 심문, “증인이 읽지 않았다고 극구 부인하나……”로 시작되는 판결문, 비밀리에 진행된 재판, 그리고 기자들에 대한 협박―“이 재판에 대해 한 줄이라도 쓰면 당신들은 끝장이야!”―과정을 거쳐 아지즈 네신은 10개월 징역형과 부르사 유배형을 선고받는다.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았던 터키의 상황은 유신치하의 우리나라의 현실―최근에도 이런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씁씁한 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유배지 ‘부르사’의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네신을 넘겨받은 파출소의 소장들은 하나같이 그를 탁구공을 쳐내듯 다른 파출소로 보낸다. ‘뜨거운 감자’라는 불덩이를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관료주의 세계에 대한 묘사는 관할구역 문제로 범인을 놓치거나 늑장수사로 가끔은 언론에 보도되는 우리나라 경찰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르사에서 유배 생활 중에 작가는 소심하고 비굴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온갖 인간 군상을 만나게 된다. ‘원칙’ 운운하면서 주인공의 돈을 가로채는 교활한 화가, 네신이 유배되어 왔다는 소식에 안면 몰수하고 사라지는 지인들, 유배된 이들을 사회주의자 취급하며 보드카를 먹이고 낄낄대는 여자, 유배된 친구를 돕는 남편과는 이혼도 불사하겠다는 아내, 거짓말쟁이 창녀, 관음증에 걸린 청년 등, 시대의 폭력 앞에서 작아지는 소시민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으며,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고 같이 껴안고 가려 하는 의지가 배어 있다.
유배지의 팍팍하고 고단한 일상을 들려주면서도 네신은 상황을 과장하거나 드라마틱한 장치를 만들지 않는다. 읽는 이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인물들이 겪은 현실의 아픔들에 더 진하게 공감하는 이유다.
배고픔에 허덕이던 저자가 어느 날 지급 보증서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누가 돈을 부친 줄 알고 우체국으로 달려갔다가 맞닥뜨린 상황은 반전의 압권이다.
『나는 창구에서 소포를 찾았다. 안에는 책이 세 권 들어 있었다. 고맙게도 친구가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살면서 그날처럼 책이 저주스러운 순간도 없었다. 책을 한 장 한 장 찢어 삼켜버리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내게 쓸모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에게 온갖 비방을 퍼부은 신문기자가 자신을 찾아와 돈을 두고 간 뒤에 했던 행동들은 우리로 하여금 저자의 처연한 상황에 깊이 공감하게 만든다.
『지금 이 글이 나의 회고록이 아니라 소설이었다면, 주인공은 청년이 두고 간 돈을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바로 일어나서 청년이 두고 간 돈이 얼마인지 세어보았다. 십 리라. 그 돈으로 내가 맨 먼저 뭘 했냐고? 냉기 어린 방에 불을 피웠다.』
또 허기에 지쳐 유배 생활 내내 자신과 함께하던 담요를 팔러 돌아다니다가 그냥 돌아오는 모습 등을 읽다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서글픔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서둘러 내 방으로 올라가 젖은 담요를 침대 위에 펼쳐놓았다. 너무나 기뻤다. 벼룩시장을 찾지 못해 담요를 팔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팔았다면, 내게 있던 무엇인가가 떨어져나갔을 것이었다. 그것은 담요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 숨겨진 신념이나 의지, 혹은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었다. 나는 하염없이 기뻤다.』
어느 날 친구가 데려가준 온천에서 물 한번 끼얹어보지 못한 채 빨래만 하다 쓰러지는 저자의 모습은 우스꽝스럽다기보다는 차라리 처연하다는 느낌까지 든다.
『사람들이 젖은 빨래를 가지고 왔다. 부르사에서 딱 한 번 온천에 가보았다. 하지만 탕에 발도 못 담그고, 사자 입에서 나오는 물 한번 끼얹어보지 못했다. 목욕은커녕 빨래도 다 빨지 못해 젖은 채로 집으로 가지고 왔다. 뢴트겐선, 유황, 비타민 등을 중얼거리다가 거의 죽을 뻔했던 것이다. 그래도 손수건 다섯 장은 새하얗게 빨았으니 다행이다. 손수건이라고 우습게 볼 게 아니다. 유배지에서는 손수건이 필수품이기 때문이다. 눈물도 닦고, 콧물도 닦을 수 있으니까』
이 소설에서 작가는 유배지하면 흔히 떠올리는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고독하고 무거운 공간이 아닌 사람들과 부대끼고 울고 웃고 다소 떠들썩한 공간으로 바꾸어놓고 있다. 비굴한 인간 군상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시선, 유쾌하고 위트 있는 풍자를 통해 슬프고 고단한 인생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네신은 “풍자는 세계를 웃음거리가 되는 것으로부터 구제해줍니다.”라는 명쾌한 말로 자신의 풍자관을 밝혔다. 그는 풍자를 통해 불의와 손잡은 권위의 알량한 알몸을 보여줌으로써, 세상을 보다 인간적인 곳으로 만들자고, 우리 삶의 기반이 더 이상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자고 말하고 있다. 아지즈 네신은 작품 속에서 광범위한 사회 계층의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다루면서 각 계층의 언어, 행동양식, 세계관, 감정, 사고를 날카롭게 포착해낸다. 그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부조리와 모순, 현학적인 자기만족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특히 성숙한 자기비판적인 시선으로 사회 시스템-정치구조, 생계수단, 남녀의 권력 구조, 도시 이주민 문제 등-에서부터 일반 대중들의 무기력하고 위선적인 삶까지 전방위적으로 문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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